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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처 주며 차별을 정당화 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교리와 장정

작성자
김정세
작성일
2016-02-26 07:11
조회
5896
제목: 상처 주며 차별을 정당화 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교리와 장정

감리회 신앙고백 1930년 7번째 항목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 됨을 믿으며 라고 고백하고 있다.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 7번째 항목에서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 됨을 믿습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약간의 수정이 있었지만 둘 다 하나님의 뜻 정의와 사랑을 이루어야 함과 모두가 형제 됨을 명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봐야 함을 명하고 계시다. 또한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를 무시와 약탈로부터 정의와 사랑으로 보호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 14장 31절)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거나 성장논리에 의하여 가지지 못한 이를 패배자로 취급할 때가 있다.
그러하기에 가진자들이 교회와 조직 또한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옷 한 벌 조차 걸치지 못하고 세상적 물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교회를 다스릴 권한이 없으신가? 하늘 권세와 하나뿐인 생명조차 버리신 그분의 용기와 능력, 그분의 사랑이 교회와 조직 또한 사회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는 놔두고 최소한 교회와 교회 조직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다스려야 한다.

목사와 먹사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목사가 되기보다, 먹고 사는 것과 명예와 권력을 좆고 그의 시녀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먹사들이 있다. 언제, 누군가에 의해 세상적 성공과 세상적 평가 방식이 교회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현실이 부끄럽다.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평가는 오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왜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성공의 잣대를 대는가! 그리스도인의 성공한 삶이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삶일 것이다. 주님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어주지 못 해서 문제지. 누가 진정 성공한 삶인가? 교회의 정신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에 교리와 장정에 상처 주며 차별을 정당화 하는 조항이 있어 바꾸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3감- 감리사, 감독, 감독회장)

감리사 미자립교회는 피선거권이 없음, 감독과 감독회장은 자립교회여야 피선거권이 있음. 이것이 무슨 근거에서 만들어진 법인가? 감리사, 감독, 감독회장의 피선거권을 미자립교회에 시무하는 목회자는 자격이 없다는 의미인데 근거는 무엇인가? 경제적 자립과 3감의 자격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지방회과 연회, 본부를 치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아니면 교회를 미자립 상태가 되게 치리한 목회자는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3감의 활동비가 측정되어 있기에 소속의회를 치리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각 교회와 여러 행사에 참여시 거마비 목록과 사례비 목록으로 받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3감 활동비로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꼭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여야 할 이유로 법을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만약 자립교회로 성장시키지 못 한 이유로 3감의 피선거권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면 이 논리가 합당한 것인가. 목회자의 자질을 오직 경제적 평가나, 외형적 성공 논리에 의한 평가가 아닌지 매우 의문스럽다. 목회 현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미자립교회라는 이유로 목회자를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시골교회와 도시 작은 교회들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 일 것이다. 그렇다고 평가를 정확히 다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이유로 3감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 단지 말한 것이다. 혹 두 가지의 이유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요, 목회자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배려와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사회이다. 성서 어디에 주님이 교인과 사도들의 자격을 경제적 평가에 의하여 제한하신 적이 있는가. 또한 어느 사회가 경제적 궁핍을 이유로 피선거권을 박탈 한 일이 있는가. 초등학교의 반장선거에서부터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저소득층이나, 차상위계층 이기에 피선거권을 제한한다는 규정이나 성문화된 법을 만들어 공고한 일은 없다.
선거 입후보자 등록비로 경제적 악자에게 장벽을 두기는 하지만 이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스스로 경제적 역량이 부족하여 포기하는 것과 애초에 경제적 역량 부족이라는 이유로 법으로 막아 버린 것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의 선거 입후보자에게 부과하는 등록비도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이 문제는 차치하고, 교리와 장정에 있는 법 조항이 사람에게 상처와 분열과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이라면 바뀌어야 한다.
이 조항들은 미자립교회 목회자와 자립교회 목회자가 다르게 대우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미자립교회 목회자를 무시해도 된다는 암묵적 차별의 행위요, 미자립교회 교인과 목회자에게 상처 주는 일이다. 더불어 앞으로 목회자들에게 작은 교회에서의 목회에 대한 회의와 기피 현상을 야기 할 것이다. 한 영혼이라도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따름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목회의 본질임에도 목회 과정에 부과되는 외형적 결과로 판단하는 것은 목회에 대한 오해에 소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감 피선거권에 관한 조항은 오직 목회를 세상적 가치 논리와 외형적 성공 논리라고 하는 틀에서 판단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기에 빠른 시일 내에 시정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글을 쓴다.

미자립교회의 명칭을 비전교회로 바꾸어 부르는 것은 미자립교회의 교인과 목회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는 것일 터 그럼에도 이와 상반되게 3감의 피선거권 제한 또는 피선거권 박탈은 재정적 박탈감 속에서 목회 사명을 감당 하고자 하는 목회자에게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며, 희망과 용기를 빼앗는 행위이다.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립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오직 경제적 도움이 되는 교인을 선호하고, 경제적 논리에 의하여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할 것이다. 몇몇 교회들의 현 상황을 볼 때,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돈, 명예, 권력이 더하여진 사람을 원한다. 아니, 믿음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우선 조건이 되어 재정적 도움이 되는 이를 교회에 장로로 세우는 일들이 야기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교회에 재정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입김이 커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직임을 맡기면서 교회에 재정적 기여를 요구하기에 직임을 명예와 권력으로 아는 이들이 있고, 이에 상처와 서운함과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목회자들 책임이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려는 뿌리 깊은 욕망과 세상적 습성을 좇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믿음이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자신을 비운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예수님의 길과 목회자의 길은 다른 것일까? 왜 목회자들이 사례비 인상에 예민한지, 임사자 사례비와 거마비에 예민한지, 강사 사례비에 예민한지, 자식과 가족의 미래, 자신의 노년의 생활에만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세상적 습성에 의한 결과 일 것이다. 부득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자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복음10장37-38)
주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전함과 동시에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에 사랑을, 배려와 위로가 필요로 하는 곳에 배려와 위로를, 돈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치료를 필요한 자들에 치료를, 평화가 필요한 자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을 앎에도 행하지 않는 우리 모습을 본다.

일년전에 전라도 광주일보 신문에서 ‘로또’라더니 … 정원미달 국공립 어린이집 많다는 기사가 실렸다. 국공립 어린이 집에 들어가는 것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공립 어린이 집이 정원 미달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유는 저소득층이 사는 임대아파트지역 어린이집이기에 사람들이 저소득층 아이와 함께 다니는 것을 기피하여서 신청을 하지 않아 미달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자신이 가진 자 이기에 없는 자를 기피하거나, 무시려는 이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지각이 있는 일반인에게도 지탄 받는 행위이다. 하물며 사람을 사랑하시며, 천벌이라 여겼던 나병환자들조차 사랑하신 주님은 더욱 싫어하실 것이다.

일각에서 현 사회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와 인간을 모욕하는 사회라 한다. 교단과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배려와 존중이 있는가, 왜 이리 무례와 모욕을 서슴없이 행하는가. 3감에 대한 피선거권 규제는 무례와 상처를 주는 법이라 생각한다. 일반 사람들이 이러한 조항을 볼까 부끄럽다.
소문에 듣기에는 미자립교회 목회자가 감리사를 맡았다가 지방에 피해를 입혀 지금의 법이 2005년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얼마나 단순한 생각에서 만들어진 법인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
제발 교리와 장정이 바르게 수정되었으면 한다. 한 영혼 밖에 없을 지라도 주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함께 살고자 하는 목회자에게 진정한 비젼을 가지고 목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으면 한다.



전체 2

  • 2016-02-26 09:47

    한국교회는 이미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 있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터 위에 세워져 있음입니다.
    더욱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은 늘어만 갈 것이며 더욱더 있는 자들을 위한 교단의 모습은 더욱 극렬해 질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신앙의 고백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감리교회의 신앙의 고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신앙의 회심이 없음이 문제입니다.

    신앙의 회심 없이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니 신앙의 회심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성장 중심주의에 빠져 있으며 평신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타락을 감추기 위하여 더욱 더 전도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도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없다 하며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교회 조직에 길들이게 합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면 그 후엔 모든 문제는 세상이 힘이 있는 자들의 사회가 되어짐과 같이 힘이 있는 자들의 교회로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제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보이지 않는 기득권 세력을 사람들은 \'일루미나티\'라 하기도 하고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하더군요.
    감리교회 안에도 이미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교단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입니다.


    • 2016-02-26 10:00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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