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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의 사람인가?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10-05 10:04
조회
1537
1. 시작하는 말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치중하는 사람은 외모인 좋은 직업과 지위, 권세와 명예를 얻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자기를 만들어 가는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치중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잘 만들어 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교양보다 더 높은 지위나 더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겪지 않아도 될 불행을 겪어 왔습니다. 또, 자신의 인격과 능력보다 더 큰 일을 맡은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환난과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또한, 인류는 비상한 머리나, 탁월한 능력이나, 박학다식이나, 통치권 등으로 주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단 같은 사람이 된 자들로 인해 고문이나, 침략 전쟁 등의 엄청난 재앙을 겪어 왔습니다.

2. 사랑과 믿음의 사람 빌레몬

바울 사도는 빌레몬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빌레몬을 말한다고 하는 칭찬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칭찬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구의 칭찬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전문성이 없고 집단 이기와 감정이 지배하는 대중이 아니라, 어떤 인격 어떤 실력을 가진 사람의 칭찬인가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부자인 빌레몬은, 서구 문화의 이대 주류인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에 능통하고, 복음을 깨닫고 확립한 바울 사도에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거리였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거리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만거리인 사람들, 원망거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거짓말을 잘하고, 막말을 잘하고, 아첨을 잘하고, 표절을 잘하고, 뇌물을 잘 먹이고, 성 접대를 잘하고, 회사나 국가의 공금 횡령을 잘하고, 불법과 편법과 범법으로 치부하며 잘나가는 높은 사람들도 원망거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무르익어 터져서 떨어지는 열매처럼, 때가 되매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를 겪어 본 사람들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목자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빌레몬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기억나서 말하게 되는 성도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신뢰할 만한 사람의 천거를 받은 사람을 귀히 들어 쓰고, 믿을 만한 사람의 부탁을 받은 사람을 신경 써 가며 돌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기도 중에 끊임없이 부탁하거나, 천거하는 빌레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빌레몬처럼, 신앙 인격을 잘 갖추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주님의 종이 기도할 때마다 기억나서 말하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부세미나에서 목사님이 남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아내와 결혼하실 분 계시면 손 들어 보세요.” 서로 주위를 돌아볼 뿐, 손을 드는 남자가 없는데,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주위에서는 환호가 들렸고, 다른 남편의 아내들은 자기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댔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아내가 싫다면요?” “그럼, 고맙죠 뭐.” (재미있는 설교유머 작성자 준솜승빠) ‘아내’ 할 때마다 무서운 호랑이가 기억나서….

빌레몬이 바울 사도의 감사거리, 기도거리가 된 이유가 뭡니까?
첫째, 빌레몬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교인은 많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해야만 할 대상은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부지런히 주님의 교회에 나와서 온 영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물을 바치면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섬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달게 듣고, 순종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목요 예배도 드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이고, 회사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주님의 영적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모든 거룩한 일이 싫어지고 귀찮아지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은 증거입니다. 요한계시록 2:4 이하를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했습니다.

둘째, 빌레몬은 모든 성도를 사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는 물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인은 주님을 사랑하여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성도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믿음의 형제자매를 미워합니다. 요한일서 4:20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똑같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불변하신 사랑의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한 성도라면, 주님의 구원의 대상인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님이 경영하는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캘커타에 사는 사람이 다 들었습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 오늘부터 사흘 동안 설탕을 안 먹겠습니다. 대신 제가 안 먹은 사흘 분의 설탕을 제게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사흘 후, 소년은 그 설탕을 들고 테레사 수녀님을 찾아갔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 신문사의 여 기자가 물었습니다. “수녀님, 사랑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님은 “사랑이란 캘커타의 한 소년이 ‘사랑의 집’에 들고 오는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 학술적으로 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론보다는 단 한 움큼의 설탕이라도 들고 오는 사랑의 실천이 절실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로 멸망당해 마땅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6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이 그 집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즉 사형감인 오네시모를 위해 베풀고 있는 선을 충분히 알게 되고, 그것이 주님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믿음의 형제로 영접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놀라운 결과를 남겼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평안함을 얻었으니”의 헬라어 아나페파위타이(ἀναπέπαυται)는 원래 슬픔이나 고통을 그치게 하는 것을 뜻했고, 여기서 원기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은 성도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그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기까지 회복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때문에, 감옥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까지 많은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과 그 좋은 결과를 보는 것은, 목자에게 기쁨과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에게 기쁨과 평안과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 슬픔과 불안과 무기력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은사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인 사고와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사랑이란 희생만이 아니라, 엄청난 유익을 초래하는 수지맞는 일입니다. 한 끼니 값 만 원이 사랑이 되면, 만 원어치의 결과만 초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들어서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빈민국의 아이를 한 달 동안 먹여 살리십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어떤 위대한 일을 해 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질로 사랑하는 우리 손보다 사랑하도록 복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훨씬 더 큽니다.

제가 성경을 탐구하여 얻은 깨달음을 제 속에 간직하면 저 한 명만 유익하지만, 그 깨달음이 사랑의 방편이 되면 입과 문서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수백 명, 수천 명이 유익하게 되고,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기도 합니다. 또한, 그들의 사랑으로 그 깨달음이 확산되는 유익은 더욱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했다고 해서 제 속의 깨달음이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확고해지고 심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목자와 사람들에게 감사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전체 2

  • 2016-10-06 16:46

    빌레몬의 훌륭한 믿음을 본 받기를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언제나 주시는 말씁 감사합니다.


  • 2016-10-08 11:19

    김정효 장로님, \"언제나 주시는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하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순탄하시기 바라며, 제가 글을 등록하는 일에 더욱 힘과 격려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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