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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기념설교-애국애족합시다./애국선열 8분을소개합니다/8월13일주/강단초록.

작성자
박영규
작성일
2023-08-12 19:05
조회
392
blog.naver.com/amenpark

광복절 기념설교-애국애족합시다./애국선열 8분을소개합니다.
성경-에스더4장16절, 누가복음 19장41-44절
*에스더4장16절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누가복음19장41절-44절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8,15 광복절 78주년을 맞이하여 8월11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 소재 중앙교회에 가서 광복절 기념예배 및 나라를 위한 특별 기도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제치하 36년의 고난과 압박과 서러움에서 해방과 독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8월13일 광복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애국선열들의 애국활동을 살펴보며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애국애족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국선열에 대한 애국 활동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제가 느낀 애국애족이란 결론을 서두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사랑하면 역사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목숨을 건다(바친다) 나라를 위해서는 순국, 하나님의 나라와 예배와 선교를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한다.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앞장을 선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양성 한다.
*나라와 민족의 구원과 발전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
*기독교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이단과 선한 싸움에서 성령의 권능과 지혜와 아가페 사랑으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로, 임마누엘의 은혜로, 나라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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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소개해드린 김구 선생, 이승만 대통령,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독립군 대장 김좌진 장군, 손정도 목사, 김상옥 의사가 우리 교단 목회자요 성도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사랑과 에스더의 민족 사랑과 애국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실천하고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동대문교회 손정도 목사님은 왜경을 피해 만주로 피신한 김일성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었고 김상옥의사는 동대문교회 성도입니다.
애국애족 정신과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정신에서 나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덟 분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1.김구선생-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은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황해도 진남포교회 에버트(엡웟)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한편, 종로에서 가두 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 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 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 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이승만 대통령
1875(고종 12년)∼1965. 독립운동가. 정치가.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 4.19의거로 사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을 주미한국대사로 임명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전쟁경과에 대한 특별방송을 통해 현 전선을 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을 촉구하는 내용을 공표했다.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하였지만,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 하였고,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하였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났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 [李承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윤봉길 의사
상하이 훙커우(상해홍구공원) 의거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사변을 일으켰고,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기독교 애국청년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십자가 형틀에 묶여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윤봉길 [尹奉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손정도 목사
과거시험 포기와 기독교 개종
손정도는 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 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후일 1976년 그의 손정도 장남 손원일은 손정도의 개종과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상 생략)...평소 괄괄하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던 손정도 청년은 당장에 몸을 떠는 성령의 감동을 맛보았다. 불과 하룻밤도 안되는 사이에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에 몸을 맡기는 변신을 이룬 것이다. ...(이하 생략)...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없애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도피와 중고교 재학
사당을 철거한 이 일로 그는 친족들에 의해 패륜으로 낙인찍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가 새벽에 그를 깨워 잠옷 바람으로 빼돌려 야간도주를 하게 되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를 통해 평양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받고 면담하였다.

문요한과의 상담 후 문요한은 그를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추천,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김형직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의 생부였다.

선교 활동
졸업반이던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실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시험 부정행위, 절도, 속임수, 험담, 불평 등을 회개할 때 참여하였다.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관리 지망생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9년 미국 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내외국선교회”를 창립하는데 가담하고 중국선교를 시작하려 할 때 선교사를 지원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10년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차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 체류 중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신민회의 핵심 인원이었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와 소개를 주고 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서로 아우님, 형님 하는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1910년 한일합방(한일합병) 소식을 접하였다.

한국 내 신앙 운동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
1911년 연회참석 차 귀국하여, 그해 4월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을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면서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자력, 자주를 역설했다.

감리교회 선교사
1911년 손정도는 한국에서 집사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1912년 3월 귀국,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선교활동을 보고하자 다시 “청국 봉천 북방 할빈 남방” 선교사로 재파송되었다. 1912년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설교, 노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예배당을 헌당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12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에도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여 순사, 형사를 비롯하여 유배지 근처의 주민, 수십리 밖의 진도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1914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다.

감리교 성직자가 되다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 때 탁사 최병헌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동대문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당시 교회의 규모는 전도사 6명, 지교회수 12곳, 입교인 312명, 학습자 142명, 원입자 469명 등 924명이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은 786명이었다. 성직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다.

1915년 감리교로부터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다. 손정도 목사를 존경한 동대문교회 교우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손정도의 교회 이임을 극구 반대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억압과 덕수궁에 살았던 고종을 위해 근처의 가옥들을 이전시켜 이화학당,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그는 1916년 이전에 해산된 엡워스 청년회를 10년 만에 재조직하고,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도 제거했다. ‘손정도식 설교’, ‘손정도식 목회’는 여기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1916년 교세는 입교자가 747명, 학습인 275명, 원입자 930명, 주일학생 820명 등 총2,772명으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발전되었다. 이 때 600원의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1917년 손정도는 우여곡절 끝에 협성신학교 제5기로 졸업했다. 1918년 6월 23일 장로(elder)목사 안수를 받고, 신병치료차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행동이었다.

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벌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33인 민족대표에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의친왕 이강공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던 그는 박신일사모가 낮에는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정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박신일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어 내는 일이었다 한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김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朱山月)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과 임시정부 참여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이 되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김철(金徹)·김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임시정부 활동

1920년 중반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Central Conference of Eastern Asia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대한예수교회 진정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3일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趙尙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

1921년 8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를 지냈다. 동시에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 치리 회원, 미션학원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만년
임시정부 유지 노력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북만주 주민들의 복지노력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될 무렵,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다 황해도의 재산을 처리하며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내지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 등 고난의 길을 걸었으나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그 주변 대분, 대강자 교회, 더 나아가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두루 다니며 돌보았다. 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별세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저하, 고문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1년 1월 한 동포 집에서 쓰러져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사후
장남(첫째 아들) 손원일은 귀국, 대한민국 해군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손정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위키 백과 사전

5.에스더
에스델(히브리어: אֶסְתֵּר‎, 현대 히브리어: Ester, 티베리안 히브리어: ʾEstēr, Esther, 에스더, 에스텔)은 구약성경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유대 여성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 아하스에로스(보통 크세르크세스 1세와 동일시됨, 재위 기원전 486년 ~ 기원전 465년)의 왕후이다. 성경 내용을 살펴보면, 아하스에로스는 와스디 왕후를 대신할 왕비를 구하였는데, 에스델(에스더)이 아름다워서 뽑혔다고 전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에스더 라는 이름은 ‘별’, ‘소녀’란 뜻. 이는 바사(페르시아) 이름이며, 히브리 이름은 ‘하닷사’였다(상록 관목이요 화석류나무).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도 본토(유다)로 돌아가지 않고 바사에 머물렀던 베냐민 사람 아비하일의 딸로서 용모가 출중했다(에 2:5, 7, 15).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촌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바사 제국의 수도인 수산에 살다가(에 2:5-7) 왕후 와스디 대신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내가 되었다(에 2:16-18).

한편 그녀의 사촌 모르드개는 왕궁의 낮은 성문 관리로 있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같은 자의식으로 인해 바사의 고관이 된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절하였고(에 3:1-2), 이로 인해 하만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결국 하만의 계략으로 유다인 약 6만 5천여 명 전체가 멸망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에 3:7-15). 이때 에스더는 유다인 전체와 함께 3일 간의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호소하고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동족을 구하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간다(에 4:16). 그 결과 상황은 반전되어 유다 백성은 오히려 보호를 받고 하만은 처형된다(에 7-8장). 이 같은 대 역전의 역사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그녀의 이름으로 된 책을 읽으며 부림일 축제를 지키게 되었다(에 9:20-32). ‘부림일’은 하만이 유다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그날을 제비(부르)뽑아 결정한 데서 유래되었다. 참고-에스더[Esther]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6.김좌진 장군
출생-사망
1889.11.24(음) ~ 1929.12.25(음)
본관 안동(安東)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주요수상-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김형규(金衡奎)이며 둘째 아들이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9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1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가서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 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김좌진 [金佐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7.유관순 열사
1902.12.16 ~1920.9.28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났다.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3·1운동의 전개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유우석(柳愚錫; 가명 유준석 혹은 유관옥)을 만났다. 그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왜경의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가 2019년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로 서훈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8.안중근 의사
출생 1879.9.2~ 사망 1910.3.26
1895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
1906년 을사늑약 체결 후 상점을 팔아 삼흥학교(후에 오학교로 개칭)를 설립.
의병활동
1904년 평양에서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 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순국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旅順]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安重根]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9.김상옥 의사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은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이다.
김상옥은 집안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며 살았다. 14세에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한문을 배우고 연동교회를 다녔다. 2년 후에는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안에 설치된 야학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1907년 9월경 동흥학교 내에 동흥야학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자신도 공부하였다.

1910년 21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 체육교사 이필주의 지도아래 청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동대문교회 근처에서 기독교서점을 운영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폐업하였다.

1912년에는 삼남 지방을 돌며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약을 파는 행상을 하였다. 이 무렵 훗날 동지로 함께 활동하게 되는 한훈을 만났고, 철물점을 개업할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해 가을에 동대문 밖 창신동에 형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주요 활동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말총 모자를 제조 · 판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 판매하였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였고 동업자들의 결속을 위한 동업조합도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 계몽과 인재 양성 사업을 위한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직원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를 빼앗았다.

1919년 4월 1일 중앙학교 학생인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인 신화수 등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4월 17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주 6회, 그 후부터는 주 1회 발행하였으며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해 8월에 『혁신공보』 발행과 관련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12월 다시 경성에 돌아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사원 5명과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스스로 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는 삼판통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별동수사대까지 꾸려진 가운데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결국 경찰 정보망에 은신처가 탐지되었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중심으로 경찰 21명이 체포에 동원되었다. 17명은 집 주변을 포위 · 매복하고, 다무라를 비롯한 4명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체포조 4명과 대치하며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나 남산으로 탈출하였다. 군인과 경찰 500여 명이 남산을 포위하고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였다.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성 시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 집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옆집으로 잘 알 뿐만 아니라 장녀 이혜수와 자매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던 곳이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이태성 집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동안을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하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10.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백성들이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 당할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인류의 죄와 사망의 문제해결을 위해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상 애국지사님들과 에스더와 예수님의 행적을 보며 애국자는 목숨을 바쳐 순국하고 에스더는 목숨을 걸었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독립투사 애국자들의 순국의 결과 동포들에게 애국 애족심을 심어주었고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8,15 광복절 78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과 나라에 충성하며 인류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선교하고 아가페로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울제자교회목사 박 영 규 *동대문교회 협동목사
*한국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목사.



전체 2

  • 2023-08-16 19:34

    아멘.


    • 2023-08-20 06:56

      한국기독교와 감리회의 역사학자 민관기 목사님,
      기독교 역사와 정신과 사상을 목회지와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주셔서 역사를 바로 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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