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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가 불교도를 건지기 위한 신학

작성자
현종서
작성일
2015-09-24 08:03
조회
1124
기독교의 복음(케리그마)을 버리고 기독교와 각기 다른 인간 이해 속에 있는 불교의 구원론에 맞추는 대화의 철학, 즉 두 종교속에 있는 도덕적으로 최고 이상인 사랑과 자비를, 논하면서 그 사랑 또는 자비는 비슷한데 혹 동질일는지도 모른다.교리로 부터 시작하면 대화가 어려우니 프락시스 가지고 말해 보자. 그렇게 대화를 터서 그 사랑이나 자비를 가져오는배경 철학을 거슬러 올라가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타력구원의 신학이나 자력구원의 불교 철학은 모습만 달리했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 생각하고--- 그래서 기독교 하나님의 대속의 구원이나 불교 부처의 자속의 깨달음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숨어계신 하나님과 불교에서 말하는 공 또는 무(nothing)는 같은 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화를 한다면 여기서 비슷한 것만 말하지 말고 서로 다른 것(유신론과 무신론, 타력구원과 자력구원, 창조론과 윤회사상 등),을 또한 말해야 할 것이다. 이름이 같거나 비슷해도 얼굴이나 행동이 비슷해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듯이 그 차이 또한 분명히 말해야 대화 다운 대화를 하게 될 것이고 상대의 진술을 바로 이해한 다음에, 그것에 동의 하여 따르든지 자기의 것을 계속 주장하며 자기의 것을 계속 따르든지 해야 할 것이다.

B 선생은 사랑과 자비의 열매를 보고 결국 가는 길이 다를뿐 목표( 거듬남,해탈)는 같은 것이 아니었을 까 생각한 듯 싶다. 그러나 자기의 정체성(케리그마)까지 버리면서 그 논리(원효의 회통사상)를 따르고자 한 것은 대화의 한 과정으로 일단 불교의 논리에 승복(겸손히 배우려) 했을 것이고 그 논리로 기독교 교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 즉,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여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시인하고 있는 분이었다면 그는 그것으로 대화를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B 선생이 살아 있었더면 그 대화의 단계를 더 진전시켰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당신에게 이 만큼 마음문 열었으니 이제 당신들 차례요 하면서 내가 나의 동일성을 잠시 뒤로 한 것 처럼 당신들도 당신들의 주장을 내려 놓고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를 들어보시오.당신들에게 없는 무슨 다른 진리가 없는지 주의를 기울려 듣고,기독교가 무엇인지 체험하기 위해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여보지 않겠소?.
그는 불교와 대화를 트긴 하였으나 감리교인으로서 자기의 동일성을 쉽게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 웨슬리와 칼 바르트를 공부한 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기의 특수 실존상황이 남 달라 불교학자를 설복시켜야 했는 데 그게 쉽지 않았을 터.. 그의 신학 실존은 불교와 대화를 해야한다는 강박감이 컷을 수 있다. 따라서 일단 그의 철학적 신학은 복음주의 신학이나 말씀의 신학을 뒤로 하고 실존신학에 충실히 정진하여 후리츠 부리 신학(윤리 강조한 나머지 그 윤리의 원천인 그리스도 대신 무제약적 책임성이라 표현)을 따라 역사적 예수 대신 그 이름을 대신해 보았다.

불트만의 예수 실존과 케리그마를 분리하는 사고에 힌트를 얻어 무제약적 책임성이라는 말로 기독교의 케리그마까지 버리는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유보하는 데 까지 갔다.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메시야 임을 부인하는 유대교도 칼 야스퍼스 철학에서 힌트를 얻고 급기야 원효의 화쟁 회통사상 을 참고하며 용수의 중관사상으로 서로 다른 불교 구원론과 기독교 구원론의 " 다름"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또는" 자기속에 자아가 일단 죽고 다시 부활하는 기독교적으로는 거듭남의 원리를 불교적으로는 인우구망, 반본환원,입전수수 논리로서 결국 같은 이야기로 대속과 자속은 불이(다르지 않다)의 단계에 이른 것이라 보았다.(신익상 설명)

그러나 신자들의 옛 자아의 죽음과 새생명얻는 중생은 회개와 복음을 믿는 과정없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하나님의 영과의 무관속에 홀로 죽고 사는 거듭남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인우구망(모두가 꿈 또는 생각일뿐),반본환원(자연이 있는 그대로 보임),입전수수(세상에서 남을 도움)는 외부의 개입없이 자기마음 속에서 사유통해 일어나는 변화로 욕심버리는 마음상태와 더불어 주위환경을 초연히 대하게 된다는 것으로 기독교의 중생에 비견된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런 구원은 다석(유영모)의 대자 불이 구원론에 맞닿게 되었다는 것인데, 유영모의 글에 의하면 예수는 석가나 공자와 같은 같은 반열로 " 진리를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 묘사하지 그가 유일한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라 말하지 않는 다.

인간이 이성 작용을 통해 진리를 찾으며 만든 종교의 한 반열에 하나님의 계시종교인 기독교를 끌어내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 메시야라는 진리를 부인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서양인들의 진리 설명이므로 동양적으로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인데, 워치만 니의 설명에 의하면 영과 혼의 차원이 구별안되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서양인들의 진리 설명이 아니라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동서양(유대교 율법와 희랍의 철학)을 초월한 가르침이요 유일한 인간 구원의 길인 구주를 가르치는 책인 것이다.

이런 철학으로 불교도를 구원하겠는가?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는 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길로 받아들이겠는 가?

불교진리에 빠져 거기 헌신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개종한 케이스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조계종의 스님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김진규 목사가 그런 사람이요 천태종의 스님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김성화 목사가 그러한 사람이다.

B 선생의 진리탐구의 열정과 그 노력은 본받을 만하나 그가 이룬 업적으로는 아직 불교도를 변화시킬 만하지 못하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왜곡과 기독교 전도에 피해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미완성 교향곡에 매달려서 성경적 구원의 길을 말하는 이들을 오히려 무식하다 치부하거나 이를 넘어 이단이라 하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의 인성만 인정하여 훌륭한 믿음의 선배로만 보자는 신학운동, 이게 자유주의 신학의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인데 이런 사상을 감신의 핵으로 둘 수는 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사도들이 외쳤던 대로 인류대속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하사 대제사장 과 중보자 역활을 하시는 분이요, 장차 재림하사 만왕의 왕으로 심판주와 통치자가 되실 분이라 여전히 성경대로 믿고 섬기고 전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감신의 중심 가르침이어야 한다.. . B선생을 명예롭게 하고 싶은가? 나도 그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을 기독교-불교 단계에서 불교-기독교단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우리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리는 인간이 구원을 추구해 가는 길(타종교들이 가는 길 처럼)이 아니라.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방법으로 만들어놓으신 길인 대속의 복음인 것이다. 그 길을 더 잘 설명해서 모든 인간들이 그 구원의 길을 값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생을 얻도록 (자신이 먼저 복음을 믿어 구원을 먼저 체험하고) 전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님이 만들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을 잊고 또는 무시하고 타락한 이성의 작용과 작품인 철학에 매달려 새길 찾아 암중 모색할 일이 아닌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길은 믿음으로 가는 길이지 사유와 공부와 사색과 명상과 공덕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성경속의 12사도와 이방인 사도바울이 말했고 종교개혁자들이 말했고 기독교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지 아니한가?

율법 전문가와 희랍철학에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 부활한 예수 만나 그의 놀라운 전도자 된 것 같이 불교 철학자가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라는 신앙고백이 나타날 때 B 선생의 대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비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다.

땅에 떨어 뜨린 예수 를 다시 제자리로 모셔 올리는 운동을 감신 신학자들은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토착화신학은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심겨주자는 것이지 전통종교와 대화라는 명목으로 그를 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전통종교를 구원의 다른 길인양 격상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복음주의 신앙인을 폭력적인 이슬람근본주의자에 비견하며 비판하고 만민에게 복음 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전도를 제국주의적인 전도하라 하는 것은 반 기독교인들의 논리에 승복한 모습이다.

감신 신학자들이여, 다시금 예수그리스도를 사도들과 성경의 증언대로 다시금 인류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재천명하는 신학,타종교인들이 진리되신 그의 가르침과 행동앞에 승복 순종케 하는 신학을 회복하고 발전시키시라.



전체 3

  • 2015-09-24 10:41

    신비도 3 종류가 있다. 혼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나타나는 것, 귀신이나 악마의 힘을 빌어 나타나는 기적,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사이적 비슷한 면이 있어도 다 다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B 선생은 불교도 나름대로 구원이있다고 했지 그 구원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라 한적은 없는 것 같은데 후학들이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2015-09-24 11:05

    공에 무에 원도 잇어요. 없다의 인식이죠. 공무원. 없고 없고 없는 것처럼 일처리를 해야하는 이들.\'
    저에겐 지금 산만한 금덩리가 잇습니다. 유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잘 갈무리하여 업습니다. 유의 상태에선 금덩이가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아 형제 자매 이웃의 어려움이 안 보입니다. 교회의 재정을 속여 은급문제와 미자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됨은 금을 자신의 눈안에 넣고 잇습입니다.

    반면, 업으면 어떤가요? 내 시야에서 사라짐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없네의 상태가 됩니다. 등 뒤에 잇는데.
    즉, 무나 공이나 하나님은 앞에다 놓고 불철주야 섬기는 존재가 아닌 눈앞에 없으나 아예 없애버림은 아닌 그저 편안하게 잔잔한 상태로 잇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교수도 A교수도 말의 어원을 모르고 부리나 야스퍼스 바르트는 더욱 몰랏을겝니다.
    어원을 모르면 문화가 이해 안되고 역사도 철학도 알 수없는 깜깜함입니다.

    물론, 옛 선인들의 숫자에 담긴 뜻을 반드시 알아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과 종교와 철학을 50% 가량 이해할 준비가 된것이니
    숫자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위에 거론된 모든 이들 천박하조.
    웨슬리나 다석도.
    하니, 종교 탄생이래 수경번 설교라는 잔소리가 이어저도 세상은 계몽이 안됩니다.


  • 2015-09-24 11:07

    잇지만 업고 잇어 무의 상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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