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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6회 II. A.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1:8-14]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5-11-18 10:00
조회
793
이제 바울은 본론을 꺼내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라고 하였다.
[이러므로](디오, διό)에 대해서는 앞 구절(1:7)을 받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기쁨과 위로를 받았으므로’라고 해석하는 설(M. R. Vincent)과 앞 부분(1:4-7)을 받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소식을 들었으므로’라고 해석하는 설①이 있다. 본서의 목적이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의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형제로서 영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보아 후자가 적합하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딤전 1:14의 주석을 보라.) [많은 ‘담력]’(딤전 3:13의 주석을 보라.)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의 출중함(1:5, 7)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오네시모의 참된 회개와 믿음의 봉사(1:10, 12, 13, 16, 골 4:9) 때문이었다.
바울은 거리낌이 없이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즉 그에게 복음을 전한(1:19)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할 수 있으나,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9】[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고 하였다.
[사랑]은 디모데전서 1:5의 주석을 보라.
[간구하오니](파라칼로, παρακαλώ)는 디모데전서 2:1의 “권하노니”의 주석을 보라.
[나이 많은 나 바울]의 [나이 많은]이란 프레스뷔테스(πρεσβύτης)인데, ‘사신’ 또는 ‘사절’을 뜻하는 프레스뷰테스(πρεσβεύτης)와는 철자 하나(ε)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사신’(엡 6:20)으로 이해하고 있지만,② 바울 자신이 이미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을 보아 대부분의 학자들처럼③ ‘나이 많은’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때의 바울의 나이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49-56세,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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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Henry, “Lightfoot”(in 이상근), W. Hendriksen, 박창환, 이상근.
2) J. Calvin, “Lightfoot, Bently, Goodspeed”(in 박창환), C. F. D. Moule, C. H. Dodd, D. Guthrie.
3) M. Henry, A. Barnes, J. Wesley, A. Clarke, J. A. Bengel W. Barclay, M. R. Vincent, J. B. Nielson, W. Hendriksen, A. A. Rupprecht, C. R. Erdman, C. S. Wemp, G. E. Failing,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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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닌(A. Maclarenin)④은 60여세로 추측하고 있다.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는 1:1의 주석을 보라.
빌레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나이 많음을 내세운 바울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죄수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혀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한다. 이쯤 되면 “빌레몬의 마음속에는 긍휼과 자비가 동하여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박윤선).
그런 다음에 비로소 바울은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구체적으로 용건을 말한다.
원문에는 [오네시모]의 이름이 맨 끝에 나타나 가능한 한 빌레몬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바울의 깊은 배려를 보여 주고 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던 부자 교인인 빌레몬의 종으로서 주인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하여 로마에 와 있던 중에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바울을 잘 섬겼고, 바울 역시 그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바울은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빌레몬서를 써 주고, 두기고와 동행하도록 배려하였다.
바울은 서슴지 않고 비천한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가리켜, “내 아들”(에무 테크누, ἐμού τέκνου)이라고 부른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였고(고전 4:15),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하였다(갈 4:19). 또한, 디모데(딤전 1:2), 디도(딛 1:4) 등을 가리켜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였다(참조: 벧전 5:13).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아들로 여기는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는 그 당시의 관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네시모의 신분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천한 것이었다. 그는 도망친 노예였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대신에 온갖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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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J. B. Nie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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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게 되어 있었다. 도망친 노예들은 보통 큰 도시나 로마 지역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이나 거주자가 없는 지역으로 갔다. 그 당시에 그들의 생포와 송환은 그 주인과 지방 행정관 사이에 비공식적으로 크게 타협할 문제였다. 그들은 흔히 무자비하게 얻어맞거나, 수명을 단축시킬 노역에 던져지곤 하였다”(A. A. Rupprecht).
도망친 노예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당시의 사회적 또는 경제적 제도 및 질서를 초월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제도 및 질서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노예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에 대해, 【11】[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라는 이름은 원래 ‘유익한’ 또는 ‘유용한’을 의미하였다.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의 노예들에게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무익하였으나]란 아크레스톤(ἄχρηστον)이며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는 것으로 ‘쓸모 없는’, ‘무익한’, ‘무용한’, ‘소용없는’ 등을 의미한다. 특히, 티트만(Titmann)은 아크레이오스(ἀχρείος)가 단순히 ‘소용없는’을 뜻하는 반면에, 아크레스토스(ἄχρηστός)의 개념에는 유해의 뜻이 포함된다고 풀이하고 있다.⑤
오네시모가 회개하기 전에는 그 이름과는 반대로 해를 끼치는 무익한 종이었다. 그는 빌레몬에게 피해를 주는 종이었으며, 도망쳤을 때는 빌레몬의 돈까지 훔쳐 갔던 것 같다(1:18).
그러나 [이제는] 곧 회개하고 주님을 믿은 이후에는 오네시모란 이름에 걸맞게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의 본래적 가치란 창조주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전의 자기 가치에 대한 무가치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인간은 믿음의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가 믿음에서 중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과 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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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n M. R.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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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이상근).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는 너무나 경건해서 이 세상에는 쓸모가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경건한 동시에 이 땅 위에서도 유익한 사람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12】[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라고 하였다.
[돌려보내노니]는 서신체 부정 과거형인 아네펨프사(ἀνεπεμψα)로서 수신자가 편지를 받는 시점에서 본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심복은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인데, {고전 헬라어에서는 원래 짐승이나 제물의 내장을 의미하였다. 특히, 장(엔테라, ἔντερα)과는 구별되는바 ‘심장’, ‘간’, ‘허파’, 콩팥을 의미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창자라는 물질적인 의미로 한 번 사용되었고(행 1:18), 그 외에는 사랑과 자비의 소재로 사용되었다(골 3:12, 요일 3:17, A. M. Hunter, R. H. Mounce)}(빌 1:8의 주석).
한 마디로 말해, 바울은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노예를 가리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루터(M. Luther)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오네시모이다.⑥
바울의 호소는 자신의 소원과 자신에 대한 빌레몬의 사랑의 의무(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임)와 그의 자발적인 선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13】[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내 복음]은 바울이 받아 전하는 복음이라는 뜻이다.
[복음]은 디모데전서 1:11의 주석을 보라.
바울이 갇혀 있는 곳이 셋집(행 28:30)이라고는 하지만,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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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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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할 수 없는 바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복음 사업에 있어서나 일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있게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바울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다. 즉, 갇혀 있는 자신을 마땅히 섬겨야 할 빌레몬을 대신해서 그의 종인 오네시모가 자신을 섬기는 셈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남에게 사랑을 구걸하거나 강요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에 주님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원리 원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승낙]은 그노메스(γνώμης)로서 기본적으로 ‘앎의 수단’, ‘인식하는 기관’을 뜻한다. 여기서 ‘정신(mind)과 그 작용’, ‘생각’, ‘판단’, ‘의견’을 뜻하게 되었다(행 20:3, 고전 1:10, 7:25, 고후 8:10).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정신’ 또는 ‘판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원치 아니하노니]의 [원치]는 에텔레사(ἠθέλησα)로서 ‘결단하다’, ‘결심하다’를 의미한다.
결국 바울은 오네시모의 문제에 관한 한, 빌레몬의 판단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단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의 [선한 일](아가톤, τὸ ἀγαθόν)은 도덕적 선이 아니라, ‘친절한 일’ 또는 ‘자선심이 많은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억지 같이]는 호스 카타 아낭켄(ὡς κατὰ ἀνάγκην)으로서 ‘필연에 따른 것 같이’라는 뜻이다(A. Barry).
빌레몬이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형제로 인정하고, 나아가서 그를 바울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은 놀라운 자선이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오네시모를 곁에 둔 채로 빌레몬에게 그러한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들어주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레몬의 자선이 그의 [자의](헤쿠시온, ἑκούσιον: 자유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비교: 출 35:29, 36:5).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할 줄 알기 때문에, 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선이란 자유 의지의 소산이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이 자유 의지의 오용과 남용이 죄요 타락이다.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강제하지 않으시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 돌아오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출처: 최세창,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년 2판 2쇄), pp. 399-404.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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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1-19 11:07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아들로 여기는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는 그 당시의 관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네시모의 신분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천한 것이었다. 그는 도망친 노예였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대신에 온갖 모욕을 받게 되어 있었다
    참다운 선이란 자유 의지의 소산이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이 자유 의지의 오용과 남용이 죄요 타락이다.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강제하지 않으시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 돌아오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최목사님 글 잘 일었습니다. 오늘도 귀한 글 감사합니다.


  • 2015-11-19 13:44

    김정효 장로님, 필자의 주석을 귀히 여기시고, 특히 더욱 공감되는 부분을 적시하셔서 감사합니다.


  • 2015-11-20 08:34

    딱 노예 이름이네요.
    실려진 몸 시모. 시종하는 시모.
    저는 하느님 노예하겟습니다.


  • 2015-11-20 09:11

    민관기 목사님, 필자의 주석에 대한 관심과 언어 유희와 의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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