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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남북관계에 대한 성경의 예언/2월14일주/사순절제1주/강단보라색.

작성자
박영규
작성일
2016-02-12 15:41
조회
2469
blog.naver.com/amenpark
설교-남북관계에 대한 성경의 예언
성경-에스겔37:15-28절.

북한이 지난주일인 2월7일 날 위성이라고 주장한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서 북이 핵실험 3차에 이은 4차 핵실험은 수소폭탄이라고 주장한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서 국제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UN의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 북의 핵보유와 미사일 발사가 우리나라와 국민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이때에 우리나라는 개성공단 폐쇄라는 강경대응으로 남북관계가 단절이 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판국에 대해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조명을 해 보며 해결책을 찾아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남북 분열의 원인
기원전 926년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 유다와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약 2세기 동안이나 분열 왕국의 형태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분열되었으며, 분열 이후 남북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반역의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 왕조야말로 사울 왕국을 찬탈한 반역자였으며, 각 지파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습니다. 남북 분열은 다윗 왕조의 시각에서는 하나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회복이며, 다윗 왕조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이었습니다.

첫째, 정치적으로 남북 분열의 원인은 저항을 획책한 [르호보암](열왕기상 12장)에게서보다 솔로몬의 실정(失政)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울의 왕권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어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윗 왕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사무엘기하 2:4)로 왕위에 오른 후,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었습니다(사무엘하 5: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이스라엘, 즉 남과 북의 지파 간의 세력 갈등과 관계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은 수도를 남쪽의 헤브론으로부터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 남북의 모든 지파를 하나로 통합하여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남북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집단들은 별개의 세력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협력하거나 또는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언제나 새로운 왕의 등극 과정에서 막후 세력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다윗이 죽고 갈등 끝에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한 솔로몬이 취한 일련의 개혁 조처들은 매우 편파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임명한 국가 고급 관료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 대장 [브나야] 등은 모두 남쪽 유다 출신들이었으며, 그가 제거한 사람들은 경쟁자였던 [아도니야]를 비롯하여 그를 따랐던 민병 대장 [요압], 아나닷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 등 주로 북쪽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역 간의 편차와 차등 정책은 북쪽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을 가지고 국가 내에서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부왕 솔로몬과 같이 차등 정책을 발표하자,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열왕기상 12:11, 16).

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인가?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열왕기12:16)

둘째, 남북 분열의 원인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을 때,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적이 있었는데, 솔로몬이 이 사실을 알아채자 그는 이집트로 피신하였습니다(열왕기상 11:29~40). 아히야의 이 발언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인 것으로서, 여로보암의 반역 행위를 조장하였습니다.

북쪽의 [실로]는 적어도 법궤가 머물던 곳으로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법궤를 남쪽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실로의 성소는 [블레셋]에게 파괴되었습니다(예레미야서 26:9).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지방 성소들의 중요성이 점차 약화되면서 지방 성소의 종교 세력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남북이 분열된 후 북이스라엘이 취한 정책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북이스라엘 지도자는 예루살렘 중심적인 종교 권력을 분산시키고자 [벧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여,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내고, 지방 성소의 제사장들로 대체하였습니다(열왕기상 12:25~33).

셋째, 경제적인 문제는 남북 분열을 촉진시켰습니다. 솔로몬의 과도한 건축 사업 및 군사력 증강은 재정 지출을 확대시켰으며, 이를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강제 노역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역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여로보암]의 저항은 솔로몬의 실정(失政)을 반영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1:26~12:33).

사실 북쪽 지파의 사람들은 남쪽 유다 사람들보다 인구도 훨씬 많고 군사력도 더 강한 사람들이었으나, 힘이 분산되고 지리적으로 단결되지 못한 이유로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차별적인 대우로 말미암아 소외되었던 북쪽 사람들의 불만은 솔로몬의 과중한 세금과 강제 부역이라는 고통을 계속 당하면서 결집되어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남북 분열에 한몫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세력 약화를 틈타, 군사적 정복과 외교적 우호 관계라는 양면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삭] 1세는 솔로몬에게서 쫓겨 온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환대하였습니다(열왕기상 11:40). 또, 시삭은 솔로몬에게 대적하다가 쫓겨난 [에돔] 왕의 아들 [하닷]을 보호해 줌으로써(열왕기상 11:14~22), 은근히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나아가, 시리아, 두로,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주변 국가들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며, 기회가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2.분열 왕국의 남북 관계
남 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으며, 지리적으로도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잘 발전되어 갔습니다. 유다 왕조의 내부는 비교적 큰 변화 없이 안정되었고, 동질적인 경향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다만, 분열 초기의 다윗 왕조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른바 '르호보암의 방어선'(역대하 11:5~12)이라 불리는 성들을 살펴보면,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국경선의 도시들이 아니라, 유다 내부의 산지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옛 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또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치는 불안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북 왕조를 창건한 [여로보암]은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조처들을 적절하게 취하였습니다. [세겜]을 수도로 하였고(열왕기상 12:25), [벧엘]과 [단]을 종교 성소로 건설하면서 예루살렘과의 정치적, 종교적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종교 행사와 제사뿐만 아니라, 달력과 축제일도 변경하여 독자적인 국가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이룩해 나갔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그의 아들 [나답]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2년이 채 되지 못하여 살해되었으며(열왕기상 15:25~27), 그 역시 아들 [엘라]에게 왕위를 계승한 뒤 2년 만에 [시므리]에게 쿠데타를 당했습니다(열왕기상 16:8~10). 북이스라엘이 첫 50년 동안에 세 차례나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북 왕조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북 왕조는 이러한 혼돈 상태를 오랫동안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남북의 경계가 불분명한 연유로 국경선에서는 소규모의 국지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었으며(열왕기상 14:30), 여로보암과 [아비야]사이, 그리고 유다 왕 [아사]가 외국 군대인 다마스쿠스(다메섹)의 [벤하닷]을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의 [바아사]를 공격하면서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남북 관계는 한층 악화되었습니다(열왕기상 15:6~7, 16~22).

이러한 불안정한 국내 정세는 외세의 잦은 침략을 불러들였습니다. [르호보암] 제5년에는 이집트의 [시삭]이 침략했으며(열왕기상 14:25),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으며(열왕기상 15:27, 16:15), 유다 왕 [아사]의 요청으로 시리아의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는(열왕기상 15:16~22, 역대하 16:1~6) 등 외세를 끌어들이는 분쟁이 잦았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는 강성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남유다 왕국을 봉신국으로 만들었습니다(열왕기하 3:7, 열왕기상 22:4). 그의 왕조는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사실상 남쪽의 유다를 지배하였습니다. 오므리 왕가의 공주 [아달랴]가 다윗 왕가의 왕 [여호람]의 왕비가 되기도 하였으며, 여호람은 남북을 동시에 통치하는 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남북 관계는 두 왕가가 각각 존재하는 통일 국가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열왕기상 22:41~50). 유대의 여호사밧은 아합의 아들 [요람]의 요청에 따라 [모압] 왕 [메사]가 반역을 도모하자 연합군을 이끌고 함께 출정하였으며(열왕기하 3:4~27), [아마샤] 왕 때 일어난 [에돔]과의 전쟁에서는 북이스라엘로부터 용병(傭兵)을 고용하는 등(역대하 25:5~13) 군사 협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남북 왕실은 서로 사돈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오므리] 왕조를 뒤엎고 등장한 [예후] 왕은 이스라엘의 왕족뿐만 아니라 유다의 왕족을 학살하였습니다(열왕기하 9:14~10:14). 예후의 시각으로 볼 때는 공조 체제를 유지하던 이 둘은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후 왕조는 유다를 지배하였으며, 유다의 몇 차례의 반란은 실패로 그치고 말았습니다(열왕기하 14:11~14). 그 후 유다의 [아하스] 왕은 친 [앗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북이스라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열왕기하 16:1~16).

오므리 왕조와 다윗 왕조 사이의 유대 강화는 두 국가 간의 분쟁과 마찰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단지 오므리 왕조의 세력 확장의 결과로 얻어진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당시 [두로]와 [시돈]과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열왕기상16:31), 모압을 정복하였고, [에돔]에는 섭정 왕을 두었습니다. 주요 교역로를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유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은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치, 군사,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되어 이상적인 통일 왕국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을 싹틔워 나갔습니다(이사야 11:11~16, 호세아 1:10~11, 2:1~2, 예레미야 3:18, 50:4, 에스겔37:15~18, 스가랴 10:6~12).

그러나 이러한 남북 관계는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앗시리아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깨어졌으며, 이때 북 왕국의 많은 피란민들이 남쪽 유다로 모여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시리아는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으로 추방시키고, 그 대신 다른 민족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써 남북으로 분열된 고대 이스라엘은 통일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게, 남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각각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출처-최창모 저, 이스라엘 사, 2007. 9. 12. 미래엔.

3.남북한의 정부수립.
현재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고, 서로의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남한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국가입니다. 이는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점령 하에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가 세워진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를 세웠으며, 이 시기 김일성의 권력욕과 맞물려 남한과는 체제, 이데올로기가 전혀 다른 국가를 형성하였습니다. 소련의 도움으로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김일성은 중국의 동북항일연합군에서 함께 활동했던 당시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원들로 하여금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게 했고 비합법적인 선거방식을 통하여 해방 후 3년 만에 북한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해방 이후 남한사회가 겪은 변화 또한 격렬했습니다. 해방과 함께 식민지 권력의 핵심이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붕괴되었으나 한국사회가 곧바로 새로운 민족 국가체제로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이후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떼어내어 독립하게 한다는 전략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독립하게 될 시기와 상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은 장차 독립국가가 될,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못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해방 후 3년의 시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특이한 시기였습니다. 해방 후 3년간 남북이 분단되고 남북한에 각기 다른 독자적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현대사회체제의 기본적 특성들이 형성된 시기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문제는 분단의 비애였습니다. 우리 조국의 분단은 현재까지도 우리 민족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민족적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뒤 같은 해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를 소집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대내외에 선포했습니다. 그보다 조금 앞선 1948년 8월15일에는 38도선이남 지역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남한 정권이 들어선 바 있습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출처]-[네이버] 참고 자료「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식민지시대 편 스칼라피노, 이정식 돌베개 1986.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해방후 편(1945~53) 〃 〃 〃「북한 현대정치사」 안드레이 란코프, 오름 1995. 「북한 50년사」 김학준 지음 두산 1999. 「북한 이해의 길잡이」 민병천 외 박영사 2000.

미국은 한국에서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할 것이며, 이러한 절차를 잠시 협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 부흥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 하였습니다. 이 결의안의 수정 통과로 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습니다. 1948년 2월의 유엔 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5월 31일에는 최초의 국회가 열렸습니다. 이 제헌국회는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되었습니다.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며, 그해 12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습니다.[출처-위키백과]

중국 상하이의 대한독립 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0~11일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ㆍ선포했습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했으며, 임시정부의 행정부인 국무원(國務院)을 구성했습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됐습니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대한민국임시정부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臨時政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종합, 굿모닝미디어)

4.남북 이스라엘과 남한과 북한의 관계.
에스겔 선지자가 본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남북이 하나가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15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21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22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 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37:15~28)

본문 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남북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며 한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두 막대기가 하나로 포개진 것처럼 십자가로 아가페로 남북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되지 않으려고 핵무기를 개발해서 3차 핵실험을 단행하였고 얼마 전에는 수소폭탄을 실험했으며 설 전날인 지난 2월7일 광명성이라는 미사일을 발사하여 남북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한국정부가 11일 개성공단을 폐쇄하기에 이르렀고 북측도 11일 오후 5:30분까지 우리 측 개성공단 인원을 추방하고 남북육로와 남북직통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되었고 개성공단도 폐쇄하기에 이르러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되고 냉전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남북이 서로 강수를 두는 것은 남북에 피해만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남북이 전쟁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을 믿습니다. 한민족인 남북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된 것은 솔로몬의 타락과 우상숭배가 원인이라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북 왕국은 앗수르에게 BC722년 멸망했고 남 왕국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북 왕조의 멸망은 우상숭배에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구소련이 핵전쟁으로 무너졌나요? 아닙니다. 콜 서독 수상과 영국대처 수상이 원조를 받으려면 성경을 받고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하자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 개방, 개혁정책을 써서 쏘비에트 연방이 와해되고 러시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군사력을 증강한다고 통일이 오지 않습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구 쏘련의 고르바쵸프 공산당 총서기가 미국과 쏘련의 전략핵무기를 감축하는데 합의를 하였고 냉전시대를 종식시키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남북이 전쟁으로 통일이 되면 안 됩니다. 북한의 동포들이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북은 성경의 예언대로 수년 내로 북 내부로부터 와해 될 것입니다. 스스로 붕괴 될 것입니다.

북의 공산 독재자 김정은은 자신의 독재 권력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고모부 장성택과 북군부의 수뇌부와 정적들을 숙청하고 총살을 했습니다. 북의 김정은은 군사력과 핵무기와 미사일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국론이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동서가 화합해야 하며 남북이 대화하고 교류해야합니다. 남북의 대치나 경색 보다는 인내하고 북한 내부의 변화를 기다려야합니다.

메시야의 예언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습니다(사14:1-2)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사14:3-23) 3년 안에 [모압]이 망한다고 예언을 했습니다(사16:13-14) 북 이스라엘의 파멸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 종교의 교리를 따른 것 때문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사17:9-11)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북에도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서울 제자 감리 교회 담임 목사 박 영 규.
*한국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추진 목사.



전체 10

  • 2016-02-15 15:07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냐 북의 적화통일이냐의 문제입니다.


    • 2016-02-16 15:26

      장로님, 물론 당연히 대한민국으로 통일이 되어야 겠지요.


  • 2016-02-16 19:42

    대한민국 통일인데 망가진 북과의 통일은 안된다는 인식이에요.
    아니 지금 10대 기준으로 우리 애들은 키가 180에 연봉이 7천인데 북 애들은 160에 2천에다 직책이 청소부.
    그러면 대한민국 중심으로 통일이 된다하여도 10 여년 안에 폭동과 같은 일이 일어나 통일은 또 깨지게 되는 일이 발생될까 두려움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북한 아이들 청소년들 먹이고 입히고(우유나 분유, 의약품, 기본의류 등)하는 최소한의 역할은 포기하면 안됩니다.
    북핵 미사일이 터저도 아이들을 포기하면 전혀 민족의 미래가 없어요.
    이산가족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 2016-02-13 15:55

    엄중한 남북관계 현 상황에 시의 적절한 설교말씀 감사합니다
    32살 철없는 김정은 정권 세습 받고 고모부를 비릇하여 100여명 중직 간부들을 총살한 살인마 입니다
    32살 혈기에 핵과 미사일을 손에 쥐고 불장난을 할 까 심히 우려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북에도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 2016-02-14 09:47

      김장로님, 북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인권을 개선해야 합니다.
      북의 독재자 김정은은 머지 않아 축출 되고 북한에 자유와 해방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합니다.


  • 2016-02-14 09:46

    큰소리로 아멘.


    • 2016-02-14 09:48

      역사학자 민목사님의 아멘은 100명 분입니다.


  • 2016-02-14 09:46

    여보 오늘은 보라야~


    • 2016-02-14 09:49

      민목사님 가르쳐 주신대로 보라, 흰색이라고 표기합니다.


  • 2016-02-14 09:50

    그래도 10 여년은 걸릴겁니다.
    문제는 무너저서 통일이냐 그래도 괜잖은 상태에서 통일이냐의 문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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