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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대중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2-16 11:01
조회
2442
1. 시작하는 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잘난 나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배려할 줄도 모릅니다. 또한, 남들을 잘난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과 이기적 욕심으로 살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부모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을 인정할 줄도 알고, 배려할 줄도 압니다. 또한, 남들을 보은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사와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며 생활하는 것은 믿음의 선진들의 사랑과 희생의 결과입니다. 대표적인 선진은 바울 사도입니다.

2.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한 바울 사도

철저한 핍박자이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바울 사도는, 성령을 좇아 능통한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 등등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구주임을 밝히는 문서를 남겼습니다. 그 문서들 중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열세 서신입니다. 바울의 열세 서신 중에서 로마서는 세상의 그 어떤 책들이나, 그 어떤 성경책들보다도 심오하고 웅대하고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방 세계에 구원의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선교 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환난과 핍박, 영적 지각도 영적 체험도 없는 지성인들의 논박과 비아냥거림, 집단 구타와 모함에 의한 채찍질, 그리고 살해 위험이 줄기차게 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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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의 종노릇을 위한 열정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인간 사랑의 열정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 바울 사도는 그때그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환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곤 했습니다.
그 바울 사도의 환난과 핍박은 3차 선교 여행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에서도 또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들은 대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바울 사도가 해를 당할까 염려한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바울이, 서원한 네 교인과 함께 결례를 행했을 때였습니다. 결례 기간인 이레가 거의 차매 에베소가 수도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 사도를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 유대교인인 유대인들 중에는,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전심전력을 다해 선교하던 바울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고, 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최고 최대의 선물인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조롱하고 박해하는 이들이 있고, 모함하여 감옥에 넣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죽여 없애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선교사들이 박해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고, 살해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려고 시도한 극단적인 이슬람교도들로 인해 중화상을 입은 교인들도 있었고, 순교하여 천국에 간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생명의 삶(2015. 9월 호)에 실린 진재혁 씨의 글입니다.
스위스에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장작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선 그는 화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감독관에게 말했습니다. “손을 제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으로 죽을 몸입니다. 제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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뛴다면 주님을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제가 믿는 주님을 당신도 믿으십시오.” 감독관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순교를 앞둔 그의 가슴은 침대에 누워 자는 사람처럼 고요했습니다. 감독관이 놀라워하며 외쳤습니다. “이 비범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복음과 영혼 사랑을 위해 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을 보면, 바울 사도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에베소가 수도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외쳤습니다. 바울은 각처에서 유대 백성과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을 헐뜯어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인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일 수도 있는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모독이고, 성전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의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고, 거기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고 헬라어와 라틴어로 쓰인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외침은 악의적 왜곡이요 모함이었습니다. 실상, 바울 사도는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인 참 이스라엘과 완전한 율법인 복음과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이 외친 모함과 고발 내용은 매우 중대한 범법이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예루살렘 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모른 척하는 것은 불충으로 간주되므로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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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성전 책임자는 바울의 피로 성전이 더럽혀질까 봐 성전 문을 닫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유대 군중은 그를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대중의 문제란 전문성도 없고,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집단 이기와 집단 감정에 의한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바울을 쳐죽이려는 군중의 집단 살의 때문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당시에 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지휘관인 천부장은, 예루살렘의 로마 수비대 사령관인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이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이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자 유대 군중은 바울을 치는 짓을 그쳤습니다. 동족의 영생 구원을 위해 복음의 사랑을 실천한 바울은, 그 동족에 의해 맞아 죽을 뻔했으나 이방인 군대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체포하여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고 명령한 뒤에, 군중을 향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문성도 없고, 사실 확인도 없는 군중이 부르짖는 대답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실상을 알 수 없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언의 계시대로 바울 사도는 이방인에게 넘겨졌습니다. 사도의 불행은 잠시 후에 이방 군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복된 기회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닥친 문제를 문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하는 불행을 불행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문제와 불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게 활용하실까 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영혼 사랑을 위해 핍박을 받아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죽어 봐야 천국밖에 더 가겠나 하는 신앙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안토니의 병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도착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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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무리가 따라오면서 바울을 없애 버리자고 외치는 포행 때문에 군사들에게 들려서 올라갔습니다.
유대교인인 유대 군중이 바울을 없애자고 외친 것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유대교인인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없애라고 외친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에게 주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잔악하게 외친 것도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었고, 주님의 사도인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잔악하게 외친 것도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해서 다 선민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칼 싸움을 한 두 목사도 있지 않습니까?

3. 맺음말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생 구원을 위해 얼마나 사랑을 해 왔습니까, 얼마나 희생과 박해와 조롱을 당해 보았습니까, 받은 은혜와 복을 얼마나 사랑과 복음 선교의 방편으로 사용해 왔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고, 믿음의 선진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채무 의식을 가지고, 보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전체 9

  • 2016-02-16 11:01

    (설교의 성경 본문 : 사도행전 21:27-36)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29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 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 2016-02-16 11:23

    아멘.
    예나 지금이나 흉악스런 사람들이 넘 많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2% 싸움이다.
    선이 51%이면 선한 세상. 악이 51%면 악한 세상. 별거 아닌거 같지만 현실.
    1만명 구원할 생각말고 딱 세사람만의 정신으로 집중해야지 않을까합니다. 가족 가문은 기본이고 남을.


  • 2016-02-16 11:35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또한 좋은 의견을 피력해서 감사합니다.


  • 2016-02-16 11:42

    세상은 대략 3분.
    유지하자 = 중도.
    발전하자 = 진보.
    회상하자 = 보수.

    그냥 인정하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하는지.
    사람은 세포에 중도 = 초록, 빨강 = 진보, 파랑 = 보수의 빛갈을 100% 다 가지고 잇대요.
    100% 빨강 초록 파랑인 사람은 없다는 거조. 다만, 33.333...%에서 약간의 차이가 잇어 치우처 보일뿐. 2% 치우치거나 부족하거나.


  • 2016-02-16 11:56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이 사람이지요. 문제는 비중과 치우침이겠지요.


  • 2016-02-16 11:58

    참조: 종교다원주의(신학)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교나 기타 종교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고 나름대로 논증을 하거나,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지향의 다양한 길이라고 나름대로 논증하며 전하러 다녔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핍박을 당하거나 살해되기는커녕, 통 큰 인물이라고 환대도 받았을 것이다.


  • 2016-02-16 14:25

    제 생각은 3.333...%인 초록 빨강 파랑은 다 잇으되 아주 약간의 치우침은 잇으며, 그 정도도 1~2% 이내이지 10%이런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약간의 차이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한계.
    세계인구 60억이면 60억이 신에 대한 이해가 모두 다르다 저는 인식합니다.
    사람과 오랑우탄의 디엔에이 차이도 2%라는군요.


  • 2016-02-16 20:41

    바울은 세상과 기독교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가 되게 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와 다른 그 어떤 종교(기독교)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였지만 그렇다고 유대교오하 다른 그 어떤 종교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도 영국성공회와 다른 그 어떤 종교(감리교)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웨슬리는 성공회를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성령의 감동을 쫓아 유대교를 회개 시킴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랬지만 다른 종교를 만들려 하진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습니다. 분명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책망했지만 유대교 지도자들과 맞선 도 다른 세력의 유대교를 만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온전한 유대교인이 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있는 자에겐 율법이 있는 자와 같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 이방인과 같이 율법의 허울을 벗으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세워지길 바랬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도 바울의 종교라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음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예수님이 만들었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음을 봅니다.
    그런것 같지만 절대로 성경적이지 못하며 믿음의 시작을 너무도 단순화 시키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와 율법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멜기세덱에 대해선 전할 것이 많지만 어리석은 자들이 알아 드지 못함으로 생략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쫓아 세움 받은 대제사장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다 하였습니다.
    결국 멜기세덱을 알고 제사와 율법을 안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다 바울은 다르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같다 아혔고 온전케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이 자신들과 달랐기에 도리어 그들이 사도 바울을 구별하고 나누고 멀리하였으며 핍박도 하였던 것입니다.
    웨슬리도 그와 같습니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것은 성공회가 웨슬리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이 성공회와 달라 하나가 될 수 없다 배척하고 정죄하고 내 쫓음으로 인해 어절수 없는 감리교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감리교회 운동은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별하고 나누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하나가 되게 하려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누가 구별하고 누가 나누었느냐? 그것은 칼빈입니다. 장로교 운동의 시작입니다.
    어쩌면 칼빈도 나누려 하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고 그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나누고 구별하여 전쟁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감리교로 돌아 가야 합니다.
    웨슬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을 받는 사람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며 그리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인해 천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나눔이 아니라 불완전한 세상을 완전케 하려는 하나됨 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죄인도 원수도 친구가 되는 것이며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 라 하는 것입니다.


  • 2016-02-16 21:41

    민관기 목사님, 노재신 목사님, 필자의 설교에 관심을 보이고, 관련하여 각각 의견을 피력하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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