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중요 성구 14회(마 5:6-8)…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7-20 10:11
조회
797
네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의]는 디카이오쉬넨(δικαοσύνην)이며 도덕적 의나 종교적 의, 또는 구원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앞의 두 가지 의미의 의는 이방인들도 나름대로 추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세상적 표준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되어 있는데, 본서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된 것에 대해, 슈바이처(E. Schweizer)는 “구약의 말씀(시 107:9, 사 49:10, 65:13, 암 8:11, 요 6:35 참조)에 동화된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벵겔(J. A. Bengel)은 주님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상, 하나님 앞에 의인은 있을 수 없다(롬 3:10).①
반즈(A. Barnes)는 “기아와 갈증은 강렬한 소망을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의에 대한 갈망을 이 기아와 갈증만큼이나 생생하게 표현해 주는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 등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눅 18:11-12).②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사 55:1, 2, 65:13, 요 4:14, 6:35, 7:37, 38). 세상 것들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서 5:10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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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로마서 3:10의 주석을 보라.
2) 저자의 누가복음 18:11-1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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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긍휼히 여기는]은 엘레에모네스(ἐλεήμονες)이며 신약성경에서는 드물게 쓰였다(히 2:17). 이 낱말은 비참한 자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감정이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비로운’, ‘인자한’, ‘사랑스런’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낱말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원조의 손을 뻗치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민 14:18, 시 103:11, 145:8, 눅 1:54, 58, 72, 78, 10:37, 딤전 1:2, 약 2:3).
벵겔(J. A. Bengel)은 “은혜는 허물을 없애고, 긍휼은 불행을 없앤다.”라고 하였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순수하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4:19).③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길이다(삼하 22:26, 시 18:25).
여섯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마음]은 카르디아(καρδίᾳ)로서 ‘생명의 중심이며’(잠 4:23), 생각(롬 10:6, 고전 2:9, 고후 3:14), 욕구(롬 10:1), 욕정(롬 1:24), 의지(고전 4:5, 7:31, 고후 7:3), 결단(고전 7:37), 행위(롬 2:15, 6:17), 근심과 고통(롬 9:1, 2), 슬픔(고후 2:4) 그리고 사랑(롬 5:5, 고후 7:3)의 주체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마음이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회개란 이성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며(고후 4:6),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한다(마 5:8, 벧전 3:4).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며(삼상 16:7, 롬 8:27, 살전 2: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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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자의 요한일서 4:19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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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어 주신다(고후 4:6).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살전 3:13), 마음에 성령을 주시고(고후 1:22), 그리스도로 하여금 마음에 거하게 하신다(갈 4:6, 엡 3:17, 골 3:15).
인간 편에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고(레 26:41, 겔 44:7, 롬 2:29), 마음에 말씀을 담아(롬 10:8)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롬 6:17).
[청결한]은 카타로이(καθαροὶ)이며 ‘깨끗한’, ‘순수한’, ‘순결한’, ‘온전한’, ‘정결한’ 등을 의미한다. {“본래 단순히 때가 묻었다든가 더럽다는 것과 반대어인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이 말은 극히 암시성이 풍부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왕겨를 모조리 골라낸 곡식, 또는 추려 내서 일급의 정예병들만이 남게 된 군대를 뜻하였다. 또, 이 말은 품질을 떨어뜨리는 혼합물을 제거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W. Barclay).}(딤전 1:5의 주석).
[마음이 청결한 자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 점을 미루어 종교적 의식이나 인격 수양 등을 통해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어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유의 은혜가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질 수 없다(롬 3:9-).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나,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호의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왕들과 통치자의 면전에 서는 것과 그들을 보도록 허락을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되었다(잠 22:29).······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총애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참조: 엡 1:18).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79-181.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의]는 디카이오쉬넨(δικαοσύνην)이며 도덕적 의나 종교적 의, 또는 구원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앞의 두 가지 의미의 의는 이방인들도 나름대로 추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세상적 표준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되어 있는데, 본서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된 것에 대해, 슈바이처(E. Schweizer)는 “구약의 말씀(시 107:9, 사 49:10, 65:13, 암 8:11, 요 6:35 참조)에 동화된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벵겔(J. A. Bengel)은 주님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상, 하나님 앞에 의인은 있을 수 없다(롬 3:10).①
반즈(A. Barnes)는 “기아와 갈증은 강렬한 소망을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의에 대한 갈망을 이 기아와 갈증만큼이나 생생하게 표현해 주는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 등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눅 18:11-12).②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사 55:1, 2, 65:13, 요 4:14, 6:35, 7:37, 38). 세상 것들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서 5:10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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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로마서 3:10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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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긍휼히 여기는]은 엘레에모네스(ἐλεήμονες)이며 신약성경에서는 드물게 쓰였다(히 2:17). 이 낱말은 비참한 자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감정이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비로운’, ‘인자한’, ‘사랑스런’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낱말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원조의 손을 뻗치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민 14:18, 시 103:11, 145:8, 눅 1:54, 58, 72, 78, 10:37, 딤전 1:2, 약 2:3).
벵겔(J. A. Bengel)은 “은혜는 허물을 없애고, 긍휼은 불행을 없앤다.”라고 하였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순수하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4:19).③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길이다(삼하 22:26, 시 18:25).
여섯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마음]은 카르디아(καρδίᾳ)로서 ‘생명의 중심이며’(잠 4:23), 생각(롬 10:6, 고전 2:9, 고후 3:14), 욕구(롬 10:1), 욕정(롬 1:24), 의지(고전 4:5, 7:31, 고후 7:3), 결단(고전 7:37), 행위(롬 2:15, 6:17), 근심과 고통(롬 9:1, 2), 슬픔(고후 2:4) 그리고 사랑(롬 5:5, 고후 7:3)의 주체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마음이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회개란 이성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며(고후 4:6),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한다(마 5:8, 벧전 3:4).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며(삼상 16:7, 롬 8:27, 살전 2: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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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어 주신다(고후 4:6).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살전 3:13), 마음에 성령을 주시고(고후 1:22), 그리스도로 하여금 마음에 거하게 하신다(갈 4:6, 엡 3:17, 골 3:15).
인간 편에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고(레 26:41, 겔 44:7, 롬 2:29), 마음에 말씀을 담아(롬 10:8)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롬 6:17).
[청결한]은 카타로이(καθαροὶ)이며 ‘깨끗한’, ‘순수한’, ‘순결한’, ‘온전한’, ‘정결한’ 등을 의미한다. {“본래 단순히 때가 묻었다든가 더럽다는 것과 반대어인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이 말은 극히 암시성이 풍부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왕겨를 모조리 골라낸 곡식, 또는 추려 내서 일급의 정예병들만이 남게 된 군대를 뜻하였다. 또, 이 말은 품질을 떨어뜨리는 혼합물을 제거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W. Barclay).}(딤전 1:5의 주석).
[마음이 청결한 자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 점을 미루어 종교적 의식이나 인격 수양 등을 통해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어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유의 은혜가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질 수 없다(롬 3:9-).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나,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호의를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왕들과 통치자의 면전에 서는 것과 그들을 보도록 허락을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되었다(잠 22:29).······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총애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참조: 엡 1:18).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79-181.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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