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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양심과 율법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0-25 12:11
조회
1257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사람이 율법을 준수하며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율법의 준수결과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행동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언제나 그의 모든 행위와 그의 마음속까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이들은...........
본문이 “이런 이들은.......”이라고 하는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행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율법을 받지 않았어도, 율법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자이면서도 부모를 거역하는 것보다는, 다른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와 같이 섬기고 받드는 사람은, 더 큰사랑을 받을 것은 당연합니다.
율법을 받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양심에 따라, 진실과 정직으로 살 때에, 그 사람은 율법을 받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아니지만, 죄의 습관과 악의 모습을 본받고 사탄의 간계로 인하여 악한 성품으로 바뀌어 집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살아온 사람은, 본성을 어느 정도 선하도록 지켜 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능과 이성을 비교할 때, 본능이라고 말하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이성의 판단 없이, 일방적으로 본래 성품의 습관으로 빠져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쳐다보고 손으로 만지고 침을 삼키며 따서 먹는 것과 같이, 죄와 악의 강도를 짓게 하는 것인데, 양심에 둔하고 본능이 강하면 그것을 느끼지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보다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악한 본능에 살지 아니하고, 선한 본능에 사는 이방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는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의 지역이며, 이방인들이 많은 곳이기에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선교에 복음적 이해가 중요함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방인을 복음으로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현재 위치를 가혹하게 비판하기보다는 가능성을 보는 일도 중요할 것입니다.
개중에는 율법을 받지 않는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려는 모습도 보였으나,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은 알지 못하는 불행으로 구원과 거리가 멀다는 실망의 모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의 증거는, 위로와 용기를 주게 될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율법은 받은 사람도 있고, 받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불공평론을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율법을 이미 세우셨으며, 그것은 각자에게 양심이 있듯이, 양심으로 증거 하는 일입니다.
이방의 마음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을 주셔서 그것이 스스로 율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증거가 되어.......
사람마다 머리가 있고, 가슴이 있고, 팔다리가 있듯이, 양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양심을 이야기할 때, 구약에서는 진리라는 말과 함께, 히브리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70인 역에서, 전도서 10:20절에, “마음”을 “양심”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서 주는 뜻은, “마음이 깊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양심이란 단어를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10:22. 죄로 말미암아 악하게 된 양심, 디도서 1:15, 믿지 않으므로 더러워 진 양심, 디모데전서 4:2, 외식함으로 무딘 양심, 요한복음 8:9, 주의 말씀으로 책망 받은 양심, 고린도전서 8:10, 무식함으로 약한 양심, 히브리서 9:14, 예수님의 보혈로 씻은 양심, 히브리서 9:9-10, 10:2, 예수님의 완전한 제사로 완전케 된 양심, 사도행전 24:16, 조심함으로 흠 없는 양심, 사도행전 23:1, 경건함으로 선한 양심, 디모데후서 1:3, 풍성함으로 깨끗한 양심, 고린도후서 1:12, 성결함으로 증거 하는 양심, 등이 나옵니다.

양심은 마치 꽃과 같이 잘 가꾸면 싱싱하게 자라지만,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고 함부로 거칠게 행동할 때, 양심은 무디어 지고 쇠하고 맙니다.
양심은 마음의 깊은 곳에 있기에 외형상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양심은 대단히 민감한 것이어서, 선한 것을 보면 기뻐하고, 악한 것을 보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양심의 민감한 소리를 통하여 전달된 충동은 사람들의 행동과 깊은 관계를 갖게 합니다.

음악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오디오를 구입합니다.
비싼 것도 있고, 싼 것도 있으나,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턴테이블을 통하여 나오는 레코드의 소리를 듣습니다.
레코드는 어떤 음악이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레코드와 접촉하는 작은 바늘이 좋아야만 합니다.
바늘이 예민하지 못하고 달아 진 것은, 레코드가 아무리 좋아도 음악을 넘기기도 하고 맑은 소리를 내지도 못합니다.
그 때문에 바늘을 조심히 충격에 닿지 않게 다루고 청소도 합니다.
그런데 비싼 오디오나 값싼 오디오나 다 똑같이 레코드의 칩이 있어야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나, 양심이 죄와 악의 습관으로 무디어진 사람도 있고, 언제나 청결한 삶으로 예민한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게 작용합니다.
그 양심은 그 사람의 모든 행위에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유대인들에게는 돌비에 새겨져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비에 새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옳은 일에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주지만, 도덕적 윤리적 악을 행할 때에는, 스스로 처벌자가 되어 악한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그 행위가 심판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에 의해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양심에 새겨진 법이, 증거 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어떤 사람들의 양심은 기능이 상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잃어버린 무감각의 양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양심이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양심의 기능을 다시 재건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9:14절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죽은 양심을 다시 부활시킨다고 했습니다.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예민한 양심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기독교인이 지닐 양심으로 회복되어 질 것입니다.

그 생각들이 혹은 송사 하고 혹은 변명하여
생각들이라는 말은 본래 이성, 의견, 취지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그 말을 반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 신념, 도덕적 판단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그들의 반성은, 양심의 심판에 따라 고통이나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그 생각 속에 지배하는 영이, 어떤 영이냐에 따라서 그의 행동은 달라집니다.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하여 악으로 이끌면, 그 사람의 판단은 이성과 양심의 외침도 외면하고 맙니다.

마치 사람의 생각 속에는, 이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대립하듯이 싸우는 것입니다.
한 생각은 송사하고, 또 다른 한 생각은 변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싸움과 같습니다.
검사는 죄인의 죄를 가중시키려 하고, 변호사는 변호하여 죄를 감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생각들이 송사하고 변호하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양심은 그의 행위가 악할 때,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 비판함으로 악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선하면 비판하지 않고 변명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두 가지 면으로 가능성을 가지고삽니다.
악에 대한 가능성과, 선에 대한 가능성입니다.
그 두 가지 면으로의 가능성속에서 양심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 봤자 양심은 그 같은 변명을 수긍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에, 악이 우리와 함께하여 치명적인 파멸의 기질로 바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일로 불법의 행사에 떨어져 비참한 실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약함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전장에서 쟁투를 벌이고 있는 선과 악의 투쟁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싸움이란, 보이지 않는 싸움이고, 가장 강력한 정복이고, 큰 승리는 피를 흘리지 않는 승리이고, 도덕적 승리자들이 가장 위대한 영웅들이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영적 전쟁은 매우 신비스럽고 기이합니다.
선과 악이 불꽃 튀는 대 접전을 벌이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은 실로 어디일까요?
영혼의 투쟁들은, 가장 강력한 투쟁이며 때때로 그것들은 가혹하게 계속되어 집니다.
때때로 신자는 자신 앞에서 선과 악의 투쟁으로 야기된 고뇌를 느끼며 풀이 죽습니다.
그러나 투쟁은 곧 생명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싸우지를 아니합니다.
영혼 안에 죽은 세력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아니합니다.
영혼의 세력들이 악의 정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아름다움과 선에 대해 깨어있고, 덕스러운 성질들로 덧입혀 지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 영적 생명이 많으면 많을수록, 양심은 더욱 예민해질 것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받는 것은 참으로 뼈아픈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영혼은 아픔도 고통도 느끼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은 아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죄의 싹은 사망이라고 양심의 죄를 송사하며 죽음을 가져다주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두 돌판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제사하고 절하고 춤추며 떠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격분하여 율법의 두 돌판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먼저 것과 똑같이 두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만들어 산으로 가지고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먼젓번과 같이 율법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러한 율법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마음에 동일한 요구의 율법들이 새겨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계시된 것처럼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방인들도 본성의 빛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율법을 소유한 것입니다.

만약 자기 행동에 대하여 율법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않았어도,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몰랐다거나,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서 지나갈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회피하려해도 스스로의 자기양심은 그것을 허용하지 아니합니다.

양심은 거짓과 타협하지도 않고 속이려 하지도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해서 잘못을 행하여도 책임이 없다고 말해도, 양심은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합니다.
양심은 이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자주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정신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깊은 곳에 율법을 새겨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마음의 판단이나,
어떤 행위를 정죄하거나 승인하는 순간에, 그 행위의 도덕성이나 부도덕성을 생각들이 송사하고 변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처벌자가 되어 악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나타나는 결과에 증인의 목적에 대답하려는 것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도록 하고, 고결한 행위를 격려하며 옳은 일을 행할 때는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처벌자가 되어 악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행동에서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도록 하시는 것보다,
더 심오한 하나님의 경륜의 원리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집니다.
차이점은 계시는 이성보다 더 깊이 파헤치며 새로운 의무와 교훈들을 깨닫도록 빛을 비춰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보면서 얻어지는 정보 보다는, 망원경으로 보면 더 멀리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이라는 눈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보는 것은, 더 많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정보들을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영심을 바로 세우고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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