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참된 인도자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7-01-02 17:19
조회
1847
우리의 참된 인도자
말라기 2:1-9, 마태복음 15:11-14.
우리가 낯선 길을 여행하게 될 때에 길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가 있으면 쉽게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의 인생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의 인생길에도 참 안내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나 석가나 마호멧을 인생길의 인도자로 알고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생의 종착점에서 허무를 깨닫고 절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안내자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안내자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나 안내자가 멀쩡한 두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경인 사람들이 길 안내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경이라고 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한 말입니까?

요한복음 9:40-41, 에 보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소경인도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라고 한 것을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소경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어느 방향인지 알지 못하는 장님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나 구덩이에 빠질 위험에 처하여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편견적인 생각과 습관에만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떠나 사는 사람이 영적소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이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고 먹어야 삽니다.

이 생명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시는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이 없는 삶은 두려움과 초조 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순서를 보면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육지가 드러나게 하시고 육지에는 모든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을 내시고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과 물속의 고기를 지으시고 그 후에 사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창조의 순서 중에서 하나라도 빠뜨렸더라면 우리 인간은 고사하고 자연은 곧 파괴되고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자연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을 때 이 땅에는 서로 해치고 파괴하고 죽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축복의 언약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 함으로부터 이 땅에는 두려움과 초조와 시기와 분쟁과 다툼과 전쟁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주 넓습니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너무도 크고 광대합니다.
자연의 변화와 생물의 번식은 우리의 계산으로 못 미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우주의 무한한 속에서 나의 존재란 티끌만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위대하고 진리를 깨 닳은 것처럼 고상한 체 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경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곳 사슴이 자기의 뿔만 자랑하고 교만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중 자신이 자랑하던 뿔이 넝쿨에 걸려서 붙잡히는 올무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주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선생들의 모습이었으며 지금까지 계속되어 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교도들이나 이단들에게 적용되기도 하겠으나 중세 유럽의 미개한 미신적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며 슬프게도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생명 길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선 길을 갈 때 잘 알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길을 다른 사람들의 안내나 조언을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의 문제도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행동하다 공연한 헛수고만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헛수고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헛수고하고 후회하며 슬퍼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손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버린 기회와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기회와 시간을 포기하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일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만 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꼭 듣고 따라야 할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면 소경중의 소경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함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영적소경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지 않고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말 2:2).
복을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마음입니다.
복을 받고 싶은 욕망과는 달리 복을 저주받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신명기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르고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임박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어 불에 타죽는 것처럼 임박한 저주와 진노의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가 죄와 죽음에서 자신을 구원한 안내자가 있습니까?
누가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을 구원받는 길로 인도한 안내자가 있었습니까?
창세 이후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모두 자신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길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노와 저주의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안내를 받는 다는 것은 둘 다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3. 진리의 법에서 떠난 사람이 영적 소경입니다.
하나님은 진리가 되십니다. 진리 되시는 하나님의 법안에서 인간은 평안을 얻고 자유롭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는 자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나, 인간이 이 땅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땅을 떠나서는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 법을 떠나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적 소경의 안내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진노와 저주를 향해 달려가다가 멸망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리를 모르면 부끄러운 망신과 구경거리가 됩니다.

말라기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또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얼굴에 똥칠”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똥은 더러운 배설물입니다.
출애굽기 29:14,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한 것은 진안에는 더러운 것을 들여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풍습에도 처가와 화장실은 멀리 두라고 했음을 잘 압니다.

나훔 3장에도 마술에 속아 죄짓는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5-6, “만 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 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영적 소경에게 속아 소경 된 자를 망신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자신도 소경이 되어 알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이끌겠다는 어리석은 자들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소경을 인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전히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나환자들만이 사는 소록도에는 교회가 7, 8개 처나 됩니다.
그곳에는 나병으로 두 눈이 어두운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몸이 불구이며 돈이 없어도 교회를 7, 8개 처나 건축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지은 이야기를 들으면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나환자 중에 눈이 있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육지로 나아가 동냥을 하면서 교회를 건축할 돈을 모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나환자들은 세숫대야를 하나씩 들고 바닷가에 나가 모래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옷자락을 잡으면 맨 앞에 눈이 있어 보는 사람이 길을 안내해서 긴 행렬을 이끌고 모래를 날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회들을 건축했는데 만약 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소경이었더라면 그들은 질서 있게 바닷가의 모래를 나르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도 건축도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건축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지고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내 눈으로 보지 못할 때 잘못된 인도자에게 기만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이해하지도 못하여 사고의 광야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은 눈이 멀거나 희미한 눈으로 영적 진리를 파악하려 시도하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혼란 된 판단에서 방황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경의 신세에서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과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말 할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경험도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류 요리사가 되는 길은 맛있는 요리를 먹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맛을 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류 요리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 있는 지휘관은 고된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나나를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바나나의 맛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기독교인도 전천후 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편할 때는 잘 믿는 것 같다가 환난과 시험이 올 때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환난과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고 이기는 성도를 전천후 성도라고 합니다.
바람이 불어도 폭우와 폭설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입니다.
순교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가 순교의 죽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힘 있게 전진한 것은 그들이 전천후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회당 안의 소경과 같이 눈을 떠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후진국은 문명국에게 착취만 당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속고 착취를 당했던 후진국들은 이제 선진국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 실례로 과거의 일본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영어를 배워 미국의 책들을 수없이 읽어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기술면으로나 앞설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일본어를 모르고 글도 못 읽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이 미국보다 모든 것이 앞서게 된 것입니다.
불안을 느낀 미국인들은 이제는 일본어를 배우려고 애씁니다.
배우는 일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소경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 목사에게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딤전 2:11). 했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분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은 배워서라도 깨닫고 깨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모든 사람들이 배우려는 열기로 가득 차 있음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알고 하는 일과 모르고 하는 일과는 결과를 보면 차이가 납니다.

70년대 월남전에 파병된 아군들은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아군들도 희생되었습니다.
어떤 지휘관은 베트콩들에게 많은 부하들을 잃고 깊이 후회했다고 합니다.
“좀 더 강한 훈련을 할 걸....... 원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실전과 같은 고된 훈련을 시켰더라면 이렇게 많은 부하를 잃지 않았을 것을..........”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본 경험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알고 귀한 것을 가져보아야 귀한 것을 압니다.

아프리카의 검둥이들은 온통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새까만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인도 만나보고 황인종도 만나보고 나서 자기들만 새까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자신이 유익 되고 남도 도와주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행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잘못은 그들 자신도 무지몽매하여 영혼들을 인도하는 자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책임 있는 직무를 거절하고 인도를 필요로 하는 소경의 보다 비천한 위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없는 사소한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큰 치명적인 본보기로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참 안내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그 분에게는 진리만 있고 불의함이 없는 동행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 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생각으로는 나약한 처세로 여겨질는지 모르지만 이것을 오히려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비결입니다.
또 이웃에 대한 처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
구제의 방법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마태복음 6:3,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마태복음 6:6,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게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입술로 주시는 말씀은 진리로 충만합니다.

2.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사람과의 사이에도 화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 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 하라 그 송사 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료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화평하지 않은 사람과 길을 동행하기는 어렵습니다.

3. 많은 사람을 죄악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인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안내자가 되시며 죄악의 길에서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이십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온 인도자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 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자신의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다 희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자신의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인류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의 길에서 범죄 하는 무리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지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인류를 구원받게 하셨고 영생의 길로 안내하셨습니다.
저주와 멸망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 인생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멸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여 지심으로 죽어야 할 죄인들을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주님이 친히 우리의 안내자가 되십니다.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전체 1

  • 2017-01-03 16:01

    무쟈게 기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71767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70134
4385 박장현 2017.01.14 2351
4384 함창석 2017.01.13 1311
4383 박영규 2017.01.13 1719
4382 강형식 2017.01.13 1488
4381 유삼봉 2017.01.13 1809
4380 김종태 2017.01.13 1836
4379 성모 2017.01.11 2474
4378 김정효 2017.01.11 1759
4377 김성기 2017.01.10 1704
4376 유병기 2017.01.10 2451
4375 현종서 2017.01.10 1350
4374 최세창 2017.01.10 2002
4373 최세창 2017.01.10 1700
4372 조동원 2017.01.10 2454
4371 최범순 2017.01.09 2002
4370 김연기 2017.01.08 1596
4369 함창석 2017.01.08 1442
4368 강형식 2017.01.08 1699
4367 함창석 2017.01.07 1932
4366 유삼봉 2017.01.07 1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