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박충구

작성자
장병선
작성일
2023-11-23 20:08
조회
114
한국교회

한동안 나의 페친이었던 고위 성직자들이 슬그머니 다 사라졌다. 그다음엔 소위 영성가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적당히 큰 교회 목사들도 사라졌다. 주야로 은혜 놀음 하던 분들도 사라졌다. 내가 정리하지 않아도 사라진 분들은 대부분 교회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성서나 하나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이들이다. 아니, 교인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신자를 개독으로 만들어 놓고 끔찍이 아끼는 분들이다.

이들은 정의와 평화를 말하면 좌파라 가르치고, 평등과 연대를 주장하면 다원주의자라 비방하고, 성평등, 성소수자 인권을 주장하면 교회 파괴자라고 비난하며, 사회 윤리와 도덕을 말하면 자유주의자요 인본주의자라고 낙인을 찍는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여간해서 페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목회자들은 대부분 나의 담벼락에서 이질감과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떠난다. 그리고 동류들끼리 모여 악성 변종 전광훈 부류의 집단에 은근히 동조한다. 비록 비지성적으로 게토화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엔 기독교 승리주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 이면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 지성적 토론, 신학을 두려워한다. 신학의 시야는 세계적이다. 따라서 이성적 근거를 떠날 수 없다. 이런 신학의 특성은 자유와 진실을 향해서 무한 개방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신학은 “God above god“에 대하여 진술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나 목사의 생각에 담긴 small God, 하나님을 넘어서게 한다. 리차드 니버는 이런 하나님을 일러 God, the enemy God이라 불렀다. 대단히 신성 모독적인 표현 같지만, 이 표현은 하나님을 찾고 편협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모든 우상숭배를 근본에서 거부하는 신앙을 옹호한다. 하지만 비지성적인 교회는 친구 같은 하나님, 서비스 해주는 하나님, 축복해 주는 하나님, 부자 되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 삼박자 축복의 하나님,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하나님을 가르친다. 역사도, 정의도, 평화도, 평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신학은 이렇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니 평생 이런 하나님을 설교한 목사는 신학자를 만나면 한없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둘째, 신학은 목사의 권위를 특출하게 옹호하지 않는다. 목사가 가진 특권, 권위, 목사의 편의, 목사의 신성성, 그런 것들의 허구를 지적 비판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교회 본질을 예수 중심의 교회에서 목사 중심의 교회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학은 목사가 가지고 있는 지성과 영성이 세속적 가치와 얼버무려 지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교인 숫자가 많다고 하여 목사가 더 위대해 지는 것은 아니고, 더 똑똑해지거나 더 지성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만과 독선과 헛된 자부심의 유혹에 빠질 위기가 더 많다. 기독교를 파괴 해 온 것은 작은 교회가 아니다.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의 교회로 전락시킨다. 그런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위대한 목사가 되고, 위대한 목사가 하는 모든 일이 마치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오인 되는 것이다. 성직 세습, 이것을 합리화 하는 집단이 대부분 자기 교회 목사를 위대한 목사라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대형교회다.

셋째, 신학은 교회에 갇히지 않는다. 교회에 아부하던 신학자들은 신학 의 존재 이유는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언제나 돈과 권력과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런 교회를 신학이 옹호한다면, 이 경우 신학은 타락하여 오염된 것이다. 오거스틴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 도성을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성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여정 중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도성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죄와 악의 공격 대상이다. 신학은 죄와 악의 공격 앞에서 교회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간혹 목사가 마치 자기 자신이 교회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한 인간이 역사성을 가진 교회의 주인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직 세습은 이런 경우 어리석게도 신자들에 의해 정당화된다.

넷째, 신학은 과거의 신학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한다. 따라서 신학을 따라 교회도 과거로부터 탈출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신학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옹호했고, 여성을 차별했으며, 정치권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잘못 가르쳤다. 오늘날 신학은 과거 신학이 범한 오류를 벗어났지만, 교회는 과거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목사가 교회 안의 권력구조를 바꾸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목사가 기존의 권력구조에서 자신의 권위와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권력 구조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신학은 왕권신수설을 이미 버렸는데, 교회는 여전히 권력 신수설을 주장하고, 신학은 성차별주의를 버리고 성평등을 가르치는데, 교회 목사들은 여전히 성차별주의자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보편화했는데, 교회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계급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서 제일 높은 계급은 성직자다. 성직자다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전근대적인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신학의 개혁을 통해 교회를 개혁 했다. 그리고 교회는 신학에 의해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신학을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속한 교단에서 오만하게 신학의 개혁을 요구했던 대형 교회 목사들은 모두 교회를 세습하고 죽었다.

다섯째, 그렇다고 하여 내가 중세기처럼 신학이 최고의 학문이라고 주장 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학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고, 신학의 영광은 오늘날 경제 권력에 빼앗겼다. 중세기 도시 한복판에는 어김없이 장엄하고 화려한 교회가 서 있었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그 자리에 정부 건물이나, 상업용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신학과 교회는 과거의 영광을 기준 삼아서는 안 된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신학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쏟아 내고, 참된 가치를 창출에 낼 수 있는 영성을 통해서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과 교회가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왜 신학과 교회가 존재 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신학이 법과 도덕을 지배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게 신학의 현실이다. 신학은 이 현실에 부딪쳐 부단히 다른 항문 영역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존재 와 행위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목사들은 교회로 도망칠 수 있다. 여섯째, 교회 안에서는 법과 도덕을 제외하고 신앙이라는 이름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목사들이 생각보다 많다. 소위 기독교 승리주의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인문 사회과학자들의모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학문적 경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사회 과학도, 자연 과학도, 인문 과학 영역에서도 외톨이가 되어 있다. 하물며 신학을 왕따시켜 온 교회 목사들은 그 형편이 어떠하겠는가? 다른 학문은 고사하고 신학까지 외면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가는 일로 만족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일찍이 Jürgen Moltmann이 지적했듯이, 세상과 대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정체성을 지킬 자신이 없어 위협을 느끼고,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세상과 단절되어 폐쇄된 교회가 제일 편한 곳이 된다. 폐쇄된 교회의 목사들은 폐쇄된 교회들을 찾아 다니며 폐쇄된 교제를 나는다. 이런 이들이 이끌어 나가는 폐쇄된 교회에 과연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인지 나는 의문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목사는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런데 상당수의 목사가 목사가 된 후 신학을 버린다. 그리고 “신학이 쓸모없다.” 라고 한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대는 공부하지 않고 목사 노릇을 하는 중이라고. 그리고 그의 교회는 공부 하지 않는 목사에게 길든 신도들이 있을 뿐이라고. 공부한 목사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대부분인 것 같아서 매우 슬프다. 사실 이런 목사와 교회에는 신학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게 좋은 책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이 시대의 영성가, 지성인인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매주 강단에서 신도들에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박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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