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관하여

작성자
이선희
작성일
2024-04-19 23:56
조회
180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뜻에 관하여.

1. “이런 자”: 고전 5:1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 여기서 취하다(ἔχειν=have)는 동사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뜻. 그러므로 아내로 삼았든지 또는 첩으로 삼았다는 뜻. 어떤 사연인지는 전혀 언급이 없으므로 추측만이 가능함. ‘아비의 아내’라고 했으므로 그 사람의 친모가 아닌 것은 확실함. 계모였든지, 또는 아비의 첩일 가능성이 있음. 아비가 살아 있으면서, 그 여자를 버렸는지, 아니면 아비가 죽어서 갈 데가 없는 여자였는지는 모르나, 이런 경우라면 그 아들이 그 여자를 소위 ‘거두어 준 것’일 수 있음. 그러나 ‘가지는 행위’(have)를 한 것은 그 여자를 아내로 삼거나 첩으로 삼았다는 뜻임(Hans Conzelmann,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p.123 참조). 그 여자와 동침했다는 뜻임. “계모와 의붓아들 사이의 결혼은 유대교의 법에서도, 로마의 법에서도 금지되어 있었다.”(H. Conzelmann, 위의 책, p.123).
2. 고전 5:2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은 그 자를 물리치지 않았다. 물리치다(αἴρω)라는 동사는 take away, remove라는 뜻이다. 즉, 교회 밖으로 축출하다(expel)라는 뜻이다(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Third Edition, ed. by F.W. Danker). 물리치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은 이 자의 그 일에 대하여 교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만하다(φυσιόω)라는 동사는 “to cause to have an exaggerated self-conception”이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고전 8:1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에도 나온다. 고전 5:2에서도 이 단어는 지식에 있어서 이들이 교만해져 있다, 즉 그들 나름대로의 특정한 지식(사상, 세계관)에 의하여 그 사람의 그 일을 해석하면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통한히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통한히 여기다(πεθέω)라는 동사는 “to experience sadness as the result of some condition or circumstance, 즉 be sad, grieve, mourn”인데, 고전 5:2에서는 “Of sorrow for sins one has committed”라는 뜻이다. 즉 다른 사람이 진 죄에 대하여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은 그 사람이 진 죄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그들의 특정 지식(사상)에 의하여 그 사람의 그 건을 죄라고 인식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죄라고 해도 그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은 그가 그런 일을 행해도 구원은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의 죄에 관하여 슬퍼하며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구성원들을 오히려 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있었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당시의 고린도라는 도시의 분위기 가운데 성전매춘(Tempelprostitution)과 영지주의 사상을 가진 소위 영적 인간들(die Pneumatiker)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하여 Theologisches Begr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Theologischer Verlag R. Brockhaus, 1983, II, p.1508의 일부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바울서신들에 있어서 πόρνη(prostitute, whore)에 관련된 단어군은 [성매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불법적 성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고전 5:1에도 πορνεία라는 단어가 이런 뜻으로 나온다]. 바울이 이 단어군을 고린도전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14회) 사용하고 있는 것은 특히 고린도교회가 이와 관련된 문제를 바울에게 제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린도는 전통적인 성전매춘의 도시였다. 고린도는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고대의 혼합주의에 대하여 개방적이었으며, 항구 주변의 빈민가에서와 성전들에서의 성적인 무절제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바로 이 항구 빈민층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고후 12:21 참조). 여기에 더하여 영지주의가 고린도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모든 것이 다 허락되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자랑하는 소위 ‘영적인 인간’(der Pneumatiker)은 신비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이 세상의 시간성의 제한을 등 뒤로 하고 올라가면서, 이 세상의 영역에서도 제한이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전 5:1ff의 [가족 간의] 근친상간(Inzest, 의붓아들과 계모 간의 성관계)을 보아야 한다.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러한 부도덕한 성행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을 때, 그 공동체 전체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고전 5:9ff).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육신적 몸을 ‘잠깐 있다가 소멸되는 것으로서 썩어지는 무엇’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육신적 몸과 관련된) 성적 욕구의 해소를 자유롭게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사상에 대하여 바울은 열정적으로 대항하였던 것이다(고전 6:9-20):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부도덕한 성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고전 6:13). 인간의 존재는 두 개의 실재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육적인 실재와 영적인 실재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도덕한 성관계(πορνεία)에 대해서는 우상숭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피하여 도망치는 것만이 답이다(고전 6:18, 10:14). 왜냐하면 바울이 볼 때, 부도덕한 성관계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세상을 사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 하나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도덕한 성관계(πορνεία) 안에서는 종교적인 힘, 마귀적인 힘이 자유롭게 풀려나와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고전 7:2, 10:8), 다른 교회들(갈 5:19; 엡 5:3; 살전 4:3 등)에 대해서도 온 힘을 다하여 부도덕한 성관계(πορνεία)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부도덕한 성관계는 [그 사람의 육신적인 몸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영과 혼과 몸]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은 그 사람의 부도덕한 성관계의 건을 판단할 때, 육신적인 몸의 일은 소멸되어 썩어질 것이므로, 어차피 썩어져서 없어지는 육신적 몸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유롭게, 즉 부도덕한 성관계에 있어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있을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그 사람의 (가족 간의) 근친상간 건에 대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지주의적 사상을 옳다고 여기면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해주는 자신들의 영지주의적 사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그들의 바람 들어간(소위 간이 부어오른) 교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여기서 멸하다는 동사는 ὄλλυμι(destroy)이다. 말하자면 “잠깐 있다가 소멸되는 것으로서 썩어지는 무엇”이 썩어져서 깨끗이 소멸되는 것이다. 육신의 몸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영지주의적 사상이다. 그러나 영은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인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들이 자랑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헛된 믿음을 조롱조로 책망한 것이다. 즉, 마지막 심판날에 과연 너희들이 믿는 대로 그렇게 될 것인지 한번 보자는 말이다. 그때 가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지금 그 잘못된 사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곧 이어서 고전 5:6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은 “τὸ καύχημα ὑμῶν”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고, 두 가지가 다 옳다: (1) 자랑하는 행위, (2) 자랑하는 내용.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문맥으로 볼 때 ‘자랑하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A Greek-English Lexikon of the New Testament에서도 이 단어의 해석이 이렇다: “act of taking pride in something, or that which constitutes a source of pride. ... what you are (so) proud of[너희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그것], 고전 5:6.”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이 자랑하는 내용은 이 문맥에서는 영지주의적 사상이요, 그 사상으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근친상간의 행동을 조만간에 썩어서 소멸될 몸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라고만 보아서 죄라고 여기지 않고, 마지막 심판에서는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관인 것이다. 바울은 이 세계관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5:5의 말씀이 “죄를 지어도, 육신은 멸하지만,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짓는 삶의 위로와 용기로 삼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인 것이다. 이 말은 오히려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간이 부어오른 교만한 어리석음을 조롱조로 책망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뒤늦은 후회 대신에 지금 곧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인 것이다. 2000년 전에 그리이스의 한 항구도시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날 전 세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못해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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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0 20:47

    과연 바울의 포커스가 도덕 또는 성에 관한 윤리였을까요?
    이 질문은, ‘도덕’ 또는 ‘성에 관한 윤리’를 지키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격하게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자구적인 해석”과 “문장 전체를 아우르는 해석”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먼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를 보면, 행위를 나타내는 ‘내주었으니’의 의미상의 주어는 누구일까요?
    Ⓐ (하나님께서) 이런자를 사탄에 내주었다.
    Ⓑ (너희가) 이런자를 사탄에 내주었다.
    의미상의 주어를 따져보며 해석하면, <이런 자를 사탄에 내어주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는 말이 안되죠. Ⓑ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어서, <아버지의 아내>에 대한 표현을 봅시다.
    소개한 주석서의 내용을 보면, “계모와 의붓아들의 결혼”은 로마의 법과 그리스의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가 공존했을까요?
    아니죠. 그리스 다음에 로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는 철학, 로마는 법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지식(사상, 세계관)에 대한 서술은, 그 “특정한”의 의미를 분명히 밝힐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해석은 문구와 문자와 문장과 그 시대적 상황을 반드시 고찰해봐야 하죠.
    예를 들어,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신전>에서 <여사제> 의해 이루어지는 제의 의식이, 일종의 ‘공창제도’로 인식되는 것처럼..
    가정하면, 아버지가 그 신전에 다녀왔고, 며칠 뒤 아들이 다녀갔습니다.
    이 상황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가, 더 잘 이해가 되죠.


  • 2024-04-25 16:59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생략했지만, 생략을 복원시키겠습니다.

    바울이 들은, 그 소문은 다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 문장의 핵심구문은 “그 아버지의 아내”입니다.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 이유는,
    법과 도덕으로 금지하는 근친상간이, 어느 문화권에든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친상간이 이방인들에게는 없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점에서 “이방인들에게 없는 음행”이란 바울의 표현은 사실관계를 다투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서신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따져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에 음행의 문제가 있었고,
    교회가 대응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이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3가지 경우를 고려합니다.
    Ⓐ 와전된 소문.
    Ⓑ 사실이지만 극소수.
    Ⓒ 사실이고 다수.

    ⒶⒷⒸ 어떤 경우에도, 서신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률관계의 경우, Ⓒ는 다릅니다. 출산이 있을 경우, 상속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석자들은, 이것을 ‘계모’와 ‘첩’이라 표현했습니다.
    주석자들의 ‘계모’와 ‘첩’은, 법률적으로 가족관계에 포함되었을까요?
    제 생각은, ‘아비의 아내’의 ‘아내’는, 법률적으로 가족관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법률적 관계에 포함되지 않는 ‘아비의 아내’는 누구일까요?

    다른 시각으로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가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선 아비의 첩을 취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비의 첩이 젊고 예뻐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아비가 죽었어야 합니다.
    늙은 아비가 젊고 예쁜 첩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아들도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이방인들도 하지 않는, 아비의 첩을 ‘부유한 아들’이 취해야 할 동기가 있었을까요??
    경우의 수를 따진다면, 이런 경우가 빈번했다고 보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고린도에는 1천명의 여사제(창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비의 아내’가 그 1천명 안에 속한 여성인지, 아닌지, 누가 알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이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소문인데, 말입니다.

    소문이든, 아니든, ‘자기 아버지와 관계한 여자’와 아들이 관계를 같는 것은, 용인되기 어렵습니다.
    저는, 바울이 그 악함을 꾸짖었다고 봅니다.
    소문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후대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기보다는..
    그 소문의 진위여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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