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설교 "관용의 정신"에 관하여

작성자
이선희
작성일
2024-04-25 11:59
조회
116
(38) 관용의 정신
(Catholic Spirit)
[1750년]

존 웨슬리/이선희 번역


열왕기하 10:15
“그가 그곳을 떠나서 가다가, 그를 만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인사하고 말하였다. 나의 가슴이 너의 가슴에 대하여 진실한 것과 같이 너의 가슴이 진실한가? 여호나답이 대답하기를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하면, 너의 손을 나에게 내밀라.”



[해설] 웨슬리의 설교들 가운데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설교들이 있다. 이 설교도 그중에 하나다. 이 설교의 제목이 우리말로는 보통 “관용의 정신(Catholic Spirit)”이라고 번역되는 관계로 일부 사람들은 이 설교를 국어사전이 말하는 관용, 즉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는 덕목을 가르치는 설교라고 오해한다. 그래서 웨슬리가 이 설교의 끝에 적용부분에서 이 설교가 말하는 관용을 사상적 자유사상주의(speculative latitudinarianism), 실천적 자유사상주의(practical latitudinarianism), 회중제도에 있어서의 자유사상주의, 또는 예배의식에 있어서의 자유사상주의와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지지하고,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세상의 다양한 사고방식들과 행동방식들을 소위 관용의 정신으로 승인하고 두둔하는 설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설교의 중심주제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설교에서 말하는 관용의 정신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일단 먼저 서로 관용할 수 있고 관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웨슬리는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웨슬리는 이 설교의 성경 본문을 따라서 그런 사람을 “나의 가슴이 너의 가슴에 대하여 진실한 것 같이 너의 가슴도 그러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가슴이 진실한가?”라는 질문이 의미하는 것을 웨슬리는 제법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한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진리를 믿는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초자연적 확신(믿음)을 갖고 있는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가 너의 영혼 안에 계시되었는가? 너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아는가? 그분이 네 안에 네가 그분 안에 거하는가? 그분의 형상이 믿음에 의하여 네 안에 이루어졌는가? 즉, 이신칭의와 중생을 체험하고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가? 너는 그분을 통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꼭 붙잡고 있는가? 또한 너의 믿음은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한가?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래서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행복을 찾는가? 너는 너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놓고 있는가? 그 이외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기는가? 너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너는 너의 뜻이 아니라, 너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너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너의 가슴은 너의 이웃을 향하여 진실한가? 너의 사랑을 너의 행동으로써 보여 주고 있는가? 지속적으로 그런가? 이런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성경이 말하는 관용의 정신, 즉 관용적 사랑(catholic love)의 대상이라고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말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는 방법을 웨슬리는 설명한다: 너의 가슴이 나의 가슴과 같이 그렇게 진실하다면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서로 사랑하자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로서, 예수의 나라와 인내에 같이 참여한 동료로서 그리고 그의 영광을 같이 상속받을 동료상속자로서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것도 이웃사랑의 정신을 갖고 인류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정도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자는 것이다. 또한 선한 일들을 하도록 서로를 자극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진실로써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이 설교에서 말하는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관용의 정신은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처럼 무릇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각자의 진리를 내세우기 전에 서로 상대방의 사상이나 종교를 그냥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런 것은 제쳐놓고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도 아니고, 사회적 약자들이나 소외된 이들의 세계관이나 종교관이나 그런 것을 서로 관용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섞어가면서 소통하고 돕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관용이라는 말도 아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관용의 정신은, 견해, 예배형식, 회중방식, 제의형식 등과 같은 주변적인 일들로 인하여 피아를 구분하면서 갈등하느라고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낭비하지 말고, 누구나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어 살아가는 일을, 즉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일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일에 서로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이신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죄를 버리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성경이 죄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사고방식들과 행동방식들을 지지하고 축복하는 것이 관용이란 말도 아니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모든 종교는 다 사랑을 추구하는 동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적 사상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이 관용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이 설교를 기독교를 왜곡하는 그런 잘못된 사상과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일에 오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전체 2

  • 2024-04-25 16:01

    이선희 교수님이 맞으시군요.
    매우 당황스럽지만, 인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글을 읽어보니,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성경이 죄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사고방식들과 행동방식들을 지지하고 축복하는 것은 잘못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모든 종교는 다 사랑을 추구하는 동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적 사상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종교다원주의자’와 ‘영지주의자’ ‘동성애 찬성 지지자’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은퇴하신 명예 교수님께서
    이 게시판보다는 학술지에 글을 게재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2024-04-27 09:57

    게시하신 내용 잘 보았습니다.

    ㈀ 많은 이들이 성경을 여러 번 읽었기에 자신들이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모세와 공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엘리야의 기도처럼…. 성경을 일화의 모음집으로 여겨 이를 아는 수준이다. 사실, 이런 수준은 유아용 설교에 적합하다.

    ㈁ 감리회 안에서도 요한 웨슬리에 대해 인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웨슬리가 전한 성경의 말씀들과 교리와 웨슬리의 삶에 배어있는 치열한 목숨을 건 전도 여행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피나는 노력이 이 사회에 교인들에게 전달된 게 기적적으로 거의 없다.

    ㈂ 성경과 요한 웨슬리를 이렇게 대하는게, 영적 전쟁에서 이미 패전한 결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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