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강 F. 믿음의 도래[3:23-29]Ⓐ 3:23-26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4-03 11:23
조회
124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앞부분(3:19-22)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의, 또는 영생을 얻는 길인 약속을 대치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임을 논의해 왔다.

이제 바울은 더욱 구체적으로 믿음 이전의 인간의 상태, 즉 율법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바울은 [믿음](텐 피스틴, τὴν πίστιν)에 관사를 사용하여, 이미 도래하신 구세주인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W. Hendriksen), 즉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黑崎幸吉, 이상근), 또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교리(M. Henry)를 의미하고 있다.❶ 칼빈(J. Calvin)은 “이 믿음은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숨겨져 있던 것들의 충분한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제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 말해 왔다. 또 다른 예는 히브리서 저자에 의해 인용되었다(히 11장).”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의 교리는 모세와 예언자들에 의해 증명된다. 그러나 믿음의 명백성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새 언약의 때를 상대적으로 믿음의 때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믿음이], 오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믿음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요(W. Hendriksen), 그를 기다리는 믿음이라(R. T. Stamm) 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하면, 성육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는 것이다.

이 표현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할 경우에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찾고 믿음으로 들어가기까지를 뜻하는 것이다”(黑崎幸吉).

[우리](그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믿음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율법에 얽매였고 또한 갇혔었다. 물론, 여기서의 율법은 의식적인 율법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 나아가 양심의 법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매인 바 되고](에푸루루메타, ἐφρουρούμεθα)란 자물쇠로 잠근 감옥에 갇힌 채, 간수의 감시를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黑崎幸吉, 이상근). 특히, 시제가 미완료 과거형인 것은 믿음의 시기까지 계속적으로 갇혀 있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R. C. H. Lenski). 따라서 율법은 인간을 가두는 감옥 또는 유치장으로 비유되었다(J. Calvin). 실질적인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M. Luther)의 말대로 영적 감옥의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 즉 모세의 율법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양심의 법을 따라 살았던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 문제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주님 자신에 의해 마련된 피할 길, 즉 그 ‘자손’(3:16의 주석을 보라.)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돈도 값도 없는 구원’이 있었지만(창 3:15, 22:18, 49:10, 삼하 7:13, 욥 19:23-27, 시 40:6, 7, 사 1:18, 9:1, 2, 6, 40:1-5, 11, 53장, 55:1, 6, 7, 렘 23:6, 막 5:2, 슥 13:1),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영광스런 기회를 이용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대신에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율법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추구하였지만, 결국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양심의 법을 따라 사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줄로 알았던 이방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자손’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었음(롬 1:18-25)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양심의 법에 갇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인간은 모든 종류의 법 아래 갇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는 모든 인간을 율법 아래 가두신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서 죄와 죗값으로 인한 죽음을 인식케 하여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인간들로 하여금 ‘후에 계시될 믿음’을 기꺼이 용납할 마음을 갖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이 초래한 보다 좋은 은혜에 애착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을 노예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보다 큰 빛과 자유의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끔 도와주는 율법의 보조적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을 몽학 선생으로 비유하고 있다.

[몽학 선생](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ὸς)은 아이(παίς)의 인도자(ἀγωγός)란 뜻이며, 이 곳 외에 고린도전서 4:15에 한 번 더 사용되었다.

이 [몽학 선생]에 대해서는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사 또는 가정 교사라는 설❷과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자녀에 대한 후견인 또는 관리인이라는 설❸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몽학 선생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몽학 선생이란 특별히 임명한 경우 외에는 선생이 아니다.”라고 한 렌스키(R. C. H. Lenski)의 설명을 미루어, 후설 곧 후견인 또는 관리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 점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몽학 선생이란 일반적으로 시중드는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헬라인이나 로마 귀족들이 7~17세❹ 사이의 자녀를 위하여 부린 노예로서, 이 노예들의 의무는 그 소년을 지키고 시중드는 일이었다. 그 소년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훈련시키며, 그의 태도를 지켜보고 교정해 줌으로써, 그 소년의 신분을 알맞게 가꾸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유해한 어떤 접촉이나 영향으로부터 그를 지키며, 어리석고 유해한 행위에서 보호해 준다. 이러한 훈련이 지속되어 신사로 길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인도하는 자’는 특별히 지정한 경우 외에는 선생이 아니다.

몽학 선생은 아이에게 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직접 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율법의 몽학 선생과 같은 역할은 성육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오기 전까지에 국한되는 것이다.

몽학 선생과 같은 율법의 역할이 인간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므로, 바울은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아래서 복음의 반포가 시작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한 용서와 생명의 길이 가장 밝은 빛 아래 나타났으므로(M. Henry), 우리는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서는 더 이상 몽학 선생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율법은 몽학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율법의 구금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다(고후 3:17, 롬 8:2 ). 그들은 몽학 선생이 필요했던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성숙한 존재가 된 것이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되고 힘을 얻었으므로, 그의 관리인인 율법을 포함하여 어린아이 같은 모든 일들을 버릴 수 있으며”(R. T. Stamm),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 모든 이유(원문에는 26절 첫머리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바울은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1:22의 주석을 보라.

문장의 구조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믿음]을 형용하는 형용구라고 하는 설(H. Alford, AV)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를 지시한다고 하는 설(J. B. Lightfoot, W. Hendriksen, RSV)이 있는데, 후자가 더욱 적합하다.

[너희가 다]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라는 뜻으로, 복음의 세계성, 우주성을 선언하는 말이다. 바울의 복음은 글자 그대로 세계적이요 우주적인 것이었다. 누구든지 다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휘오이 테우(υἱοὶ θεού)로서, 하나님의 자녀들(M. Luther),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양자 결연(adoption)의 사상이다(1:1의 주석을 보라). 이제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몽학 선생의 감시 아래 있는 부자유스러운 노예의 상태가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성숙한 아들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인이나 권세자 또는 부자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랑이요 기쁨이며 더없이 큰 은혜이다. 그렇다고 하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되었다는 것(4:7)보다 더 큰 자랑과 기쁨이 있을 수 없으며,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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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C. R. Erdman과 R. C. H. Lenski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2) C. R. Erdman, 黑崎幸吉, 이상근. KJV.
3) M. Henry, R. T. Stamm, O. F. Blackwelder, E. H. Perowne, W. Barclay, S. J. Mikolaski, W. Hendriksen, E. Huxtable. RSV.
4) 참조: J. Dow와 윤성범 박사는 6~16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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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61-16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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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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