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8강 2:1-10 예루살렘 회의(2:1-2a)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1-03 10:37
조회
91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이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독자성이 결코 무정부적이거나 분열 혹은 분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W. Barclay). 즉, 앞에서(1:18-24) 자기의 사도직과 복음이 다른 사도들 내지 교회와 무관한 것임을 설명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의 참됨이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행 15장)에 참석한 것에 대해,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라고 한다.
[십사년 후에]에 대해서는 바울의 회심 이후라는 견해❶와 베드로를 방문한 후(1:8)라는 견해❷가 있는데,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가 적합하다. 따라서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회심 후 약 십칠 년이 되는 것이다. 이번 방문 이전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예루살렘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전하기 위해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행 11:29-30, 12:25).
[예루살렘] 회의에 바울과 동행한 이는 [바나바]와 [디도]이었다.
[바나바](Βαρναβά)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인으로서 원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사도들이 그를 권위자란 뜻인 [바나바]라고 불렀다. 그는 초대 교회가 공동생활을 할 때, 밭을 판 돈을 사도들 앞에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믿음의 소유자였다(행 4:36-37). 그의 성품은 착했으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전도의 능력이 있었다(행 11:24). 또한, 그는 선지자와 교사(행 13:1), 그리고 사도(행 14:14)라 불린 바울의 친구였다.
[바나바]는 바울이 사도들과 사귀고자 할 때(고전 1:18, 행 9:26), 그를 두려워하는 사도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를 소개하였으며(행 9:27), 한때 바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함께 복음을 가르쳤고(행 11:26), 또한 바울과 함께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형제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행 11:30).
바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선교 여행에 같이 구브로로 다녀 남쪽 소아시아까지 선교하였다. 이 여행 중에 바울의 이름이 늘 먼저 쓰였다(행 13:43-50).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쉰 뒤에,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 및 율법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복음의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복음의 진리가 공인되었다(행 15:1-29).
그러나 얼마 뒤에, 바나바는 잠시나마 복음의 진리와 관련하여 위선된 행동을 한 베드로를 면책한 바울과는 달리, 베드로의 위선을 좇는 나약한 면을 드러내기도 하였다(갈 2:13).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할 때는 바나바가 자기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을 고집하고(골 4:10), 바울은 마가가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돌아가 버렸던 사실을 들어 반대함으로써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섰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 등으로 갔다(행 15:36-41).
바나바의 마가에 대한 신념은 뒤에 마가로 하여금 복음서를 저술하는 등의 큰 활약을 하게 했으며, 또한 바울의 신임을 회복하게 하였다(딤후 4:11).
두 번째 선교 여행 이후의 바나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만한 근거가 없다. 다만 {“여기(고전 9:7)에 바울이 바나바의 이름을 같이 적은 것을 보면, 바나바도 고린도 교회에 널리 알려질 만큼 선교 사업에 종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김용옥)}(고전 9:7의 주석).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화해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디도](Τίτον)는 헬라인(2:3)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고후2:13, 7:6, 13, 14, 8:6, 16).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참조: 고후 12:18)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딛 1:4)이라고 부를 정도로 디도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스탐(R. T. Stamm)도 “디도는 바울의 동반자요 동역자이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려운 일을 맡길 만한 판단과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 실상, 디도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수습하는 임무를 비교적 잘 감당하여 그 교회의 상황을 상당히 호전시켰다. 특히, 가짜 사도들 및 가짜 교사들에 미혹되어 바울과 그의 사도직에 대해 오해하고 비난하던 일부 고린도 교인들을 잘 설득하여, 다시금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 와 호감을 갖도록 하였다(참조: 고후 2:13).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한 것은 특별히 의미깊은 일이다. 디도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유대 율례를 도무지 복종하지 않고, 모세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가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이방인 신자들과 모세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강조하며 분명한 초점을 보여줄 것이다”(C. R. Erdman).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용기를 보게 된다. 즉, “결정적인 본보기로서 무할례자이며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디도를 동반함으로써, 유대주의적인 신자들의 교훈이나 관습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M. Henry).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디도를 동반했다는 것은 할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며, 또한 사도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3절)과 “그를 형제로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J. Calvin)는 점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동기에 대해, 【2】[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하여]는 카타(κατά)로서 ‘좇아’, ‘따라’, ‘······에 근거하여’ 등의 뜻이다.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시](아포칼룹신, ἀποκάλυψιν: 1:12의 주석을 보라.)에 근거한 것이지, 자기 자신이나 예루살렘 교회의 소환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누가는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즉.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 거짓 교사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안디옥의 형제들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 외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파송했다는 것이다(행 15:1-5).
그러나 바울과 누가의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며, 바울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주관적 체험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의가 있다. 이 점에 대해 칼빈(J. Calvin)은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을 확증한다.······하나님께서 여행을 지시함으로써 그의 교훈이 참된 것임을 확증하신다. 따라서 그의 교훈이 확증됐다는 것은 인간의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실상, 사도들은 논쟁이나, 이의 없이 그가 행한 일을 인정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생의 중대한 문제에 국면할 때마다 환상을 통해서나(행 16:9-10, 18:9, 27:23. cf. 22:17-18: 기도시 비몽사몽간에 본 환상) 예언을 통해서나(행 13:2, 21:11) 또는 자신의 마음속에 임하는 성령의 강한 충동에 의해서(행 16:6, 7)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처리하곤 하였다. “바울이 자신의 행동이나 사업을 착수함에 있어서, 특별한 신적인 지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M. Henry).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시작하려고 하는 모든 중대한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의 갈 길이 명백해지도록 애를 써야 하며, 또 하나님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M. Henry).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필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한 일과 그 까닭에 대해,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저희]와 [유명한 자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인지,❸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것인지❹가 문제된다. 전자를 따르면 바울이 처음부터 [유명한 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에 대해 사사로이 설명한 것이 되고, 후자를 따르면 먼저 [저희] 곧 예루살렘 교회에, 그 다음에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자신의 복음에 대해 설명한 것이 된다. 사도행전 15:1-35의 내용과 6절의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이란 말을 보아 후자가 타당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예루살렘 전 회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유명한 자들인 “야고보, 베드로, 요한”(2:9)❺ 등에게 “그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내내 전하여 왔고, 또 전하려고 다짐하고 있는 교훈에 대하여, 또한 유대주의의 온갖 혼합 요소를 벗어난 순수한 그리스도교에 대해 자유롭고도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M. Henry). 그와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함으로써”(행 15:4), 자기 일행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것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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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J. Calvin, H. Alford, E. H. Perowne, W. M. Ramsay, F. Rendall, W. Sanday, E. Huxtable.
2) J. Wesley, R. C. H. Lenski, R. T. Stamm, J. B. Lightfoot, E. D. Burton, J. A. Bengel, “Zahn, Bousset, Beet”(in 이상근), 黑崎幸吉.
3) M. Henry, J. Wesley, H. Alford, R. C. H. Lenski, C. R. Erdman, “Zeller, Beet, Moffatt”(in 이상근), R. T. Stamm, E. Huxtable, 윤성범, 박윤선.
4) J. B. Lightfoot, E. D. Burton, O. F. Blackwelder, E. H. Perowne, W. Sanday, J. Dow, “Meyer, Vincent”(in 이상근), 黑崎幸吉, 이상근.
5) 비교: M. Henry는 사도들과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 중의 지도적 인물들이라고 하고, C. R. Erdman은 사도와 장로들이라고 하고, 박윤선 님은 원 사도들과 장로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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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91-9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5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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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2

  • 2023-01-03 10:40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 2023-01-04 09:58

    ※ 본 글의 “[바나바](Βαρναβά)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인으로서 원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사도들이
    그를 권위자란 뜻인 [바나바]라고 불렀다.”의 권위자는 권위자(權威者)가 아니라 권위자(勸慰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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