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4강 Ⅲ복음과 율법(3:1-4:31) A. 믿음이냐 율법이냐[3:1-5]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2-21 10:04
조회
150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앞(2:15-21)에서, 복음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한 바울은 느닷없이,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나무라고 있다.

[어리석도다]는 아노에토이(ἀνόητοι)로서, ‘어리석은’, ‘비이성적인’, ‘지각없는’ 등을 의미한다(J. B. Lightfoot, 윤성범).

여기서는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의 진리에 대한 몰이해를 뜻하는 것이다(黑崎幸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이유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설명하였다.

[밝히 보이거늘]은 프로그라포(προγράφω)로서 ‘앞에 쓰다’, ‘공공연하게 묘사하다’, ‘게시하다’, ‘광고하다’, ‘그림으로 묘사하다’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구세주이심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너무도 명백하고(KJV), 공공연하게(RSV)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울이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아주 생생하고도 인상적인 모습이라 할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며(J. Calvin, M. Henry), 또한 주님의 만찬의 성례가 그들 가운데 집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M. Henry). 이와 같이 “명백하게 알려진 구원의 도로서의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그들의 죄란 그 만큼 더 한심스런 것이다”(J. Calvin).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는 것은 결국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마16:26)을 스스로 불못(계 20:14) 가운데로 내던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한 바울은, 이제 그들을 미혹시킨 것짓 사도(교사)들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M. Luther). 그 비난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꾀더냐]는 에바스카넨(ἐβάσκανεν)이며, ‘악한 눈’(The evil eye)을 믿는 대중 신앙에서 기인된 것으로, ‘유독한 영향을 주다’. ‘시기하다’(J. B. Lightfoot, E. H. Perowne), ‘비방하다’, ‘요술을 부리다’, ‘호리다’(R. T. Stamm), ‘미혹하다’(O. F. Blackwelder) 등의 뜻이다. 이 말은 또한 은유적으로 마법에 의해 눈이 머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E. D. Burton, S. J. Mikolaski).

따라서 바울의 말은 마술사가 마법으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처럼, 거짓 사도들이 구원의 진리 위에 터를 닦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거짓 진리 곧 율법주의로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교리와 기이한 능력과 재주를 이용하여 연약한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무리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히 12:2).

갈라디아 교인들과 거짓 사도(교사)들인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근본적인 문제인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미혹 당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는 “묻는 것”(黑崎幸吉, 이상근)이라기보다는, 이미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Textus Recceptus).

그 중요한 사실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한 바울의 말속에 나타나 있다. 바울의 취지는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을 준행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의 [율법]은 “의식적 율법”(E. Huxtable, S. J. Mikolaski)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율법”(M. Luther)으로 보아야 한다. 전체로서의 율법이란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성문법과 구전법 이외에도 이방인의 양심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보른캄(G. Bornkamm)이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다른 방법이긴 하지만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쓰여진 것이다.······이방인의 양심에 쓰여진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무력한 것이다. 양심이 선악을 판단하기는 하나 선악의 절대적 법정이 될 수 없으며, 양심의 법과 하나님의 의지가 늘 동일한 것도 아니다.❶

결국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 행위, 또는 양심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듣고 믿음으로냐](ἐξ ἀκοής πίστεως)는 직역하면, “믿음의 들음에 의해서냐?”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1) 믿음을 복음과 동의어로 보아 복음을 듣는 것,❷ (2) 믿음의 선전을 듣는 것(H. Alford), (3) 믿음으로 듣는 것,❸ (4) 믿음을 생기게 하는 말씀, 즉 복음을 듣는 것❹ 등의 해석이 있다.

여기서는 (4)설이 적합한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바울 등을 통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거룩한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육체로 끝마치려고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탄식 조로 나무란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섭리를 따라 오셔서 세상 죄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해 주시고(요 14:26, 15:26, 16:13-14, 빌 2:5-), 또 그분을 주님으로 믿게 해 주신다(고전 12:3. 참조: 고전 12:9). 또한,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과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롬 8:16, 고후 1:22, 엡 1:13-14. 참조: 엡 4:30), 그 신분에 걸맞는 성결한 생활을 가르쳐 주시며 하게 하신다(갈 5:16, 18, 22-).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은 인간에게 믿음과 함께 복음에 관련된 모든 영적 지식을 일깨워 주시고, 순종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새 생명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黑崎幸吉. 참조: 요 3:3, 50).

케네디(H. A. A. Kennedy)는 “성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서 신자 안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존재 형태이다.”❺라고 하였다. 바울은 명백하게 신자 안에 거하는 성령을 말하고 있다(고전 3:16, 6:18, 고후 1:22, 롬 8:9, 11, 15). 이 “성령은 신자에게 보내 주신 종말론적 선물로서”(R. Bultmann),❻ 죄와 죽음 그리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후 3:17). 또한,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도덕적 식별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행할 수 없었던 도덕적 삶을 가능케 하신다(5:16-17). 따라서 “신자의 삶이란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5:16, 25)”(E. J. Goodspeed).❼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다시금 육체(2:16의 주석을 보라.)로 마치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죄와 죽음의 법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자극적인 말로 일깨워 주고 있다(J. Calvin).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많은 괴로움]에 대해 (1) 인내로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는 설(J. A. Bengel, (2) 거짓 교사가 율법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설(Meyer, Vincent),❽ (3) 선의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De Wette, Winer),❾ (4) 성령의 경험이라는 설(J. Dow, S. J. Mikolaski, E. D. Burton), (5) 선악간의 믿음의 귀한 체험이라는 설(R. T. Stamm, “Moffatt, Lietzmann”❿), (6) 처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됐을 때에 받은 핍박이라(행 13:44-52, 14:2, 5, 19)는 설⓫ 등이 있다.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⑹설이 가장 적합하다.

어드만(C. R. Erdman)은 “그들이 복음을 받았을 때 받은 핍박과 곤란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그처럼 심한 환난을 겪은 그 복음을 버린다면 어떠한 이익이 있을 것인가? [과연 헛되냐]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썩어 없어질 생명이 잉태되기 위해 산모와 태아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지 모른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고통을 무릅쓰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얻은 생명을 상실한다면, 그 모든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 더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2절의 질문을 반복하고, “그러므로”(운, οὖν)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이 부분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의 동사인 에피코레콘(ἐπιχορηγών)은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처음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성령을 풍부히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엡 5:18).

성령을 풍부히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다.

[능력]은 뒤나메이스(δυνάμεις)로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뜻하였고,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고전 1:18, 눅 1:17, 행 3:12, 롬 1:16), ‘힘있는 행위나 이적’(마 11:20)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dynamite)로 영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나타내기도 한다.

[행하시는]은 에네르곤(ἐνεργών)으로서, ‘힘을 발휘하다’, ‘활동하다’, ‘작용하다’, ‘효과적으로 행하다’ 등을 뜻한다(롬 7:5, 고전 12:11, 갈 3:5, 빌 2:13, 3:21).

[능력을 행하시는](ἐνεργών δυνάμεις)이란 현재 분사형이며, ‘이적을 행하다’라는 뜻이다.⓬

페로운(E. H. Perowne)은 이적이란 인간을 통한 성령의 초자연적 작용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점에 대해 블렉웰더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적이란 보다 높은 영원한 질서의 제한된 표현이거나 단편적 표현일 것이다.······가장 위대한 이적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역사상의 절대적 이적은 그분의 부활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한 가지로 그분이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인간의 어려움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이론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행하시는 분을 소유한다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항상 성령을 풍부하게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묻는다. 물론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자신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또한 그 결과로서 놀라운 이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3:1-5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의 전도와 교육을 통해서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구주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서 성만찬식이 집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그리스도를 버리는 짓은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주의로 미혹시킨 거짓 사도(교사)들을 비난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돌이키기 위해, 그들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즉, 그들이 성령을 풍부히 받았고, 또한 그로 인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 행사가 율법 또는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바울이 안타깝게 책망하는 것은, 많은 핍박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새 생을 시작했던 그들이 다시금 육체 곧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예속되려고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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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G. Bornkamm, op. cit., pp. 123-132.
2) J. Calvin, E. D. Burton, E. Huxtable, “Vincent”(in 이상근), 박윤선.
3) M. Luther, F. Rendall, “Zahn”(in 黑崎幸吉), 黑崎幸吉.
4) J. B. Lightfoot, R. T. Stamm, O. F. Blackwelder, E. F. Harrison, 이상근.
5) H. A. A. Kennedy, op. cit., p. 123.
6) R. Bultmann, Theology of the Nw Testament, trans. by G. Kendrik, Vol. Ⅰ(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4), p. 335.
7) E. J. Goodspeed, Paul(New York: Abingdon Press, 1947), p. 110.
8) in 이상근.
9) 상동.
10) 상동.
11) “Augustine, Chrysostom, Zahn”(in 이상근), M. Luther, J. Calvin, J. B. Lightfoot, F. Rendall, E. D. Burton, E. H. Perowne, W. T. Dayton, C. R. Erdman, 黑崎幸吉, 이상근.
12) R. T. Stamm, O. F. Blackwelder, E. H. Perowne, 黑崎幸吉, 이상근, RSV. 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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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2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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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1 10:05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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