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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요한 Vs 광야의 세례 요한 & 선지자 요한

작성자
노재신
작성일
2015-12-28 16:47
조회
1476
석청과 메뚜기 그리고 낙타털옷,
이것들은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만큰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거칠고 힘든 생활에서 원기와 활력을 보충해 주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석청과 메뚜기 그리고 낙타털옷은 세례 요한의 요단강 이후의 삶에 매우 중요한 표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을 목격했고 변질이 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분계를 하여 회개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모습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와 환경을 무시한 채 그 어떠한 이상을 제시하고 그 이상이 최고의 선이라 말하기도 하고 의라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상정한 이상이며 선일 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상이나 꿈이 아니며 최고의 선도 아닙니다.

사막에선 사막의 선이 있으며 광야에서 광야의 선이 있고 도시에선 도시의 선이 있습니다.
호랑이에겐 호랑이의 선이 있으며 늑대에겐 늑대의 선이 있고 지렁이에겐 지렁이의 선이 있으며
사람에겐 사람의 선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겐 그 시대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이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는 선이 있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선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가 임의적으로 상정한 선은 하나님의 선이 될 수 없으며 절대적 최고의 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선이 있다면 상대적 선이 있으며 의가 있다면 그 또한 상대적 의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임의적으로 자신의 뜻을 선의로 상정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거짓 믿음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상정한 선과 의를 절대적 선인 하나님의 선과 동일시 함으로 시대적 괴리감에 빠져듭니다. 그 괴리감은 곧 자신도 모르는 자학의 현상으로 드러나며 또 다른 하나님을 오해케 하는 일들이 되어 집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괴리감이며 자학이 됩니다.
물론 시대가 악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악함은 그 시대의 악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선지자들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나타나기도 합니다.

선지자가 고난을 당하며 선지자가 외면을 당하고 선지자가 핍박을 받는 일들이 선지자들의 괴리감과 자학에 따라 나타납니다.
귀로만 듣던 것으로 시작된 선지자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큰 고통과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죽음의 위기도 맞게 되는 것 입니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의 경우 더더욱 그렇기도 하며 참선지자들도 때론 그것을 알지 못함으로 큰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진정 참 선지자라면 하나님은 절대로 참선지자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과부과 같이 서러움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참 선지자를 찾아오시며 그를 대면하시며 그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위로하고 힘을 주시며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참 선지자는 주님을 대면하는 순간 자신의 의로움이 도리어 자신의 외식과 탐욕과 더불어 스스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의 세례 요한에게도 있었던 일 입니다.
그제서야 진실로 참 선지자로써 칭의를 얻으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며 하나님의 일을 강당케 됨으로 바람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자는 다 그와 같이 됩니다.
참 선지자들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으며 그 믿음이 오늘도 살아서 이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할까? 늘 사람들은 이 정의에 대한 의문을 갖습니다.
임의적으로 사람이 상정한 정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가 아니라 상대적 의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의같아 보이지만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그 의는 반드시 바뀌어 도리어 불의가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의가 불의가 되고 도리어 불의가 의로움이 되어 지는 일들은 다반사이며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움 같지만 어리석음이며 이것이 정의인것 같지만 도리어 불의가 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진정 하나님의 뜻을 쫓아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던 것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그 판단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또 다시 불의를 쫓아 행하는 어리석음일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란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일으킬 선지자로서의 선지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지자가 된 것에는 주님의 오심은 예(준)비하고 곧게 하는 일에만 있었을 뿐입니다.(마3:3)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주님의 성전을 증거하는 증거자일 뿐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성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에 대한 질책이 틀렸다 할순 없을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하는 선지자로서의 요한으로 본다면 그것은 요한의 월권이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큰 죄가 될 수도 있었음 입니다.

결국 헤롯왕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판과 질책은 후에 세례 요한에게 있어선 생사의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청과 메뚜기 그리고 낙타 털옷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 어떠한 위협으로부터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노아에겐 무지개의 언약이 있었다면 세례 요한에겐 석청과 메뚜기 그리고 낙타털 옷이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참 된 성전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해야 하는 선지자로써의 자신의 길이 아닌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으로써의 임무를 요단강가 광야에서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진정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는 선지자로써의 사명이 있었다면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참다운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을 떠남으로 제사장의 직무를 버리고 광야에서 예루살렘을 책망하고 질책함으로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로 다가올 것인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루살렘의 제사장의 길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광야에서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해야 할 선지자의 길이 요한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며 이유입니다.(요1:6,7)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들보다 의로우면 의로울수록 세례 요한의 비난의 강도는 더 커졌지만 그 책망의 결과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회개가 아닌 요한 자신의 몸이 광야의 삶에서 상해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몸이 상한 것은 광야라는 지역적인 특징과 낯설다는 환경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가하시는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부르짖는 회개하라의 외침이 강하면 강할 수록 세례 요한의 책망의 강도는 더 커졌지만 그 책망의 결과는 대 제사장과 장로들의 회개가 아닌 요한 자신의 심령에 광야의 삶에서 허해지고 분함으로 채워져만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심령이 허해지고 분함으로 가득찬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극악무도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있음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곧게 해야할 선지자로써의 길을 걷지 않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외침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세례 요한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져만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세례 요한의 모습이었으며 생사의 커다란 문제가 세례 요한에게 다가오게 된 요인이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였지만 그는 참 사람이 아니었고 그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례 요한은 그 빛을 증거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 빛의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 요한의 그 비판과 책망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례 요한, 자신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는 광야로 인도하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단강가의 광야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닌 도리어 요한 자신이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곳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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