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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중요 성구 21회: 주기도문 연구 I (마 6:9-13)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11-01 11:44
조회
1473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교훈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친히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치신다.

본서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은 상당히 다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동기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용어 사용도 다르고, 전해지는 형태도 다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동기에 대해서, 전자는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들의 잘못된 기도를 보신 것이라고 하고, 후자는 한 제자의 요청이라고 하였다.

용어 사용이나 내용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풍부하다. 따라서, 전자의 내용은 후자의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 형태라는 느낌을 주고, 후자의 내용은 전자의 내용에 대한 요약 형태라는 느낌을 주나, 양자의 본질적인 기도 내용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많은 루가의 사본들은 그러한 차이들을 완화시키고 있으나, 보다 짧고 덜 세련된 텍스트가 원래적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Metger, 154-156).①}(눅 11:2의 주석).

문제는 마태와 누가가 같은 자료를 사용했는지, 그랬다면 마태가 그 자료에 설명을 첨가한 것인지, 누가가 그 자료를 간략하게 수정한 것인지, 어느 한 쪽이 그 자료대로 기록했고, 다른 한 쪽이 설명을 첨가했거나 간략하게 수정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살(I. H. Marshall)은 “루가가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의 문장들을 삭제했을 성싶지는 않다. 루가의 기도문이 마태오와 Q형식을 편집한 것이라는 고울더(M. D. Goulder)와 오트(Ott, 112-123)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따라서, 두 가지 형식으로 주기도가 전수되었다고 하겠다(E. Lohmeyer, 293).”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 역시 예수께서 가르치신바 교회가 사용하는 주기도문을 변형시킬 정도로 자신의 설명을 첨가했을 리가 없다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누가와 마태가 각각 전수받아 기록한 주기도문이 같은 자료에서 비롯된 것인지,(Holtzmann),② 다른 자료에서 비롯된 것인지(Bleek)③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두 주기도문이 다 원래 예수님의 교훈이라는 것이다(A. Plummer).}(눅 11:2의 주석).

한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나, 같은 사람이 같은 주제에 대해 여러 곳에서 교훈할 때, 핵심 내용이 아닌 일반적인 내용이나 형태까지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주기도문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아름다움과 포괄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J. Calvin)은 “이 여섯 항목에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총괄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주기도문의 내용 중 일부는 유대인의 저술들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이처럼 아름답게 조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다.④

이 주기도문은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된다.

[하늘](우라노이스, οὐρανοίς)은 {보이지 않는 세계, 영원한 영역을 의미한다(F. B. Mayer). “하늘은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의 한 장소―성부의 영광의 현현과 접촉하는―임에 틀림없다”(W. G. Blaikie).}(엡 1:20의 주석). 또한, 하늘이란 말은 “절대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Traub).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마태의 사상은 예수님이나 사도 요한이나 바울이나 베드로나 마가나 누가 등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긴 하나(출 4:22, 시 68:5, 89:26, 사 9:6, 63:16, 64:8, 렘 3:4, 9, 말 2:10) 미미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에게서 본격적으로 개인화 내지 신령화 되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신약성경,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주류가 되었다.

메이첸(J. G. Machen)은 “하나님의 부성의 교리는 예수님과 바울이 똑같다.”⑥라고 하며, 케네디(H. A. A. Kennedy)는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교훈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의 부성의 계시는 바울의 종교적 개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했다.”⑦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살전 1:1, 살후 1:2, 골 1:2, 몬 3 등).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의미에 대해서 바르트(K. Barth)가 자신의 「교의학 개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란 인간관계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인간관계에 적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서, 또 자신의 본성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위한 아버지이시다.…참되고 정당한 부성은 하나님 안에 있고, 바로 이 하나님의 부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부성이 생기는 것이다. 신적 부성은 모든 자연적 부성의 근원이다.”⑧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양자(빌 2:15)가 될 수 있다. 양자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고대 세계에서 가족이 양자를 삼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양자 결연 의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양자 결연 의식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동전과 저울을 사용한 상징적인 매매 행위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들의 친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한 번 팔았다가 다시 사고, 두 번째 팔았다가 또다시 산다. 그리고 세 번째 팔고는 다시 되사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양아버지가 로마의 행정 장관인 집정관에게 가서 양자 결연의 건을 신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일단 양자가 되면, 양자의 과거의 모든 빚과 계약은 무효가 된다. 양자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간주된다. 미래의 모든 면에서도 양자는 다른 아들과 똑같은 근거를 갖는다.”⑨

바울은 양자의 개념을 구속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롬 8:23).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다(엡 1:4). 이 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 대신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양자의 영을 받았다(롬 8:15, 갈 4:6). 이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이며, 양자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롬 8:14). 따라서 케네디(H. A. A. Kennedy)는 “양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환경들, 즉 세상과 생명과 죽음과 현재적인 것들과 다가올 것들의 주인이다. 바울은 항상 이 승리적 조건들을 성령의 선물과 결합시킨다.”⑩라고 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삶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자유로 특징지어진다(요 11:52, 롬 8:21, 고후 3:17).

양자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 8:17). 이 고난은 죄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고난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고전 4:10-13, 9:19, 고후 1:5, 4:8-10, 11:23-32, 빌 1:29, 3:10, 골 1:24, 살후 1:5, 딤전 4:10, 딤후 1:8).

한 마디로 말해, 양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죄로 인해 마귀에게 끌려가던 우리가, 창조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한 사랑의 신비가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다를 바 없고, 또한 예수님의 교훈과도 일치한다고 하면, 결국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의 교훈이나, 혹은 그것에 근거된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공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의 아버지로서의 신관의 깊이는 약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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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I. H. Marshall.
2) in 이상근.
3) 상동.
4) 참조: A. Barnes, 이상근.
5) Traub, “οὐρανός” in TDNT, Vol. V, p. 498.
6) J. G.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Michigan: Eerdmans, 973), p. 161.
7) H. A. A. Kennedy, The Theology of The Epistles(London: Duckworth, 1959), p. 105.
8) K. Barth, Dogmatics in Outline, trans. by G. T. Thomson.(SCM Press Ltd, 1966), p. 43.
9) W. Barclay, Ambassador for Christ(The Saint Andrew Press, 1973), p. 170.
10) H. A. A. Kennedy, op. cit., p. 138.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235-244.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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