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1-29 06:00
조회
1023
마태복음 2:1-12.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요,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들에게 꼭 필요한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꼭 오셔야 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야 삶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지혜로운 이방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지혜자들이요, 시대적인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입니다. 언제나 시대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하며 징조를 찾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의 변화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연구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별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의 징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해와 달과 별들이 미래를 보여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별들은 민족의 번성과 전쟁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별은 주의 사자들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계 1:20). 그러므로 박사들이 별들을 보면서 징조를 연구한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마 16:3)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시대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시대는 급하다고 하면서도 세상 징조에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동방박사들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박사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찾았다는 것은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땅에는 모두가 절망이요, 범죄요, 타락한 삶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며, 부패한 헤롯 왕조의 윤리적 타락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당시의 헤롯은 어린이 살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였고,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의 헤롯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며, 예수님의 사도들의 시대의 헤롯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만용을 저지르다가 저주받아 죽었습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교권주의에 빠져 타락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물량주의에 빠져, 성전 안에서까지 세속적인 황금만능주의를 끌어들이고, 팔고,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을 공공연하게 하였습니다.
율법 자들은 율법연구와 교육이 아니라, 반대자를 색출하고, 율법의 올무에 걸어서 체포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룩한 종교행사보다는 비판과 험담만 찾아다녔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방인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찾았고, 하나님의 역사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헛된 것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비록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다 할지라도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 거쳐 가는 곳이지만, 저 하늘은 영원히 거하게 되는 우리의 본향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향락과 패역에 물들어 간다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의 삶은 천국의 시민 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 시에 다른 짐승들처럼 땅을 내려다보게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며 살게 지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을 멀리 보고, 높은 곳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향락이나 쾌락에 치우쳐 사는 것은 가장 저속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의 지혜 자들, 박사들은 밤마다 깨어있었습니다.
세상은 모두 깊은 어두움 속에 자고 있을 때에, 이들은 언제나 뜬눈으로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어두움에 쌓여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아무도 보아주는 자도 없고, 환호하는 자도 없고, 박수 쳐주는 자도 없고, 격려해 주는 자도 없지만, 이방의 지혜 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묵묵히 자기들의 할 일만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누가 보아주어야 신명이 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격려해 주어야 신명이 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환호해 주어야 신명이 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박수 쳐주고, 찬사를 보내어야 신명이 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이방의 지혜 자들은 들에 핀 가시밭의 백합화같이 묵묵히 어두운 밤을 지키며 자기들의 일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어두움을 탓하고 슬퍼하지 맙시다.
세상은 어두워도 새벽의 파수꾼이 되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지혜자가 됩시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방의 지혜자가 되어 어두운 하늘에 동공을 띄우고 새벽을 기다리는 시대의 파수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두려워 떠는 살인자 헤롯이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도착했습니다.
박사들은 기다리는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실 줄 알았던지, 아니면 왕궁에서 태어나실 줄 알았던지, 예루살렘 왕궁에서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 박사들의 이 짧은 말은 온통 예루살렘 성을 소동하게 하였고, 헤롯과 왕궁을 술렁이게 하였고, 수없이 많은 어린 사내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하였던 것입니다.
박사들의 책임 없는 한마디의 말이, 이처럼 크게 혼란과 비극을 가져올 줄은 그들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인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책임감 없이 뱉은 한마디의 말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에 치우쳐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오해로 빚은 실수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방의 박사들은 그리스도를 찾는 일이야 당연합니다.

다른 곳보다도 왕궁에서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얻게 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큰 비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헤롯왕의 지나친 소심함과 피해망상에 의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속담에 자라보고 놀라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헤롯은 자기의 잔인하고 패역한 성품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있음을 짐작할 것이고,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헤롯은 박사들의 말에서 자기의 왕권을 빼앗기게 되는 경쟁자가 나타났다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어 확인을 한 뒤에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하였으나, 그것은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헤롯의 계교를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박사들에게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셔서 다른 길로 되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헤롯은 나중에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군사들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베들레헴에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이러한 무자비한 살인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의 성품은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우”라고 부를 정도입니다(눅 13:32).
헤롯은 어두움을 좋아하고 빛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에 살고 있는 헤롯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어두움에 사는 자는 빛을 보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오히려 빛으로 오신 예수를 없이 하려고 칼을 빼어 휘둘렀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땅에 속한 왕권으로 칼을 휘둘러보아야 허공만 칠뿐입니다.

갓난아기들은 자기 손가락을 빨아댑니다.
조금 자라면 닥치는 대로 입으로 끌어다 먹습니다.
먹을 것인지 못 먹을 것인지도 상관이 없이 입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크면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구분하고, 좀 더 크면 맛있는 것을 골라 먹을 줄 압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구분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살인자 헤롯은 영적 상태로 볼 때, 가장 천박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곰은 사냥꾼이 매어 단 바위를 머리로 받아 스스로 죽는 것처럼, 헤롯은 스스로 두려움에 떨며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사울의 고백처럼 마귀가 뒷발로 가시 채를 차면 오히려 자기 발목이 아프듯이, 헤롯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서슴지 아니하고 저지른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지 못하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어김없이 밝아옵니다.
두려워 떠는 헤롯의 광란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일이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모든 백성들이 기다렸으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든 것이 안정되지 못한 삶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삶입니다.
여우같은 헤롯왕의 치세는 모든 백성들에게 언제나 불안케 하는 정치였습니다.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라면, 얼마나 가혹한 정치를 했을 것은 짐작이 됩니다.

헤롯은 로마 정부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왕위를 사온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자기의 본전을 뽑아내기 위해서도 백성들에게 많이 토색하여 내었을 것입니다.
그의 간교함도 박사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많이 시달려온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도 백성들은 시달려왔습니다.
종교의 대표자들은 모두 부패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가르치기만 하였지 지키지는 않았으며, 성전에까지 매매하고, 바꾸고, 파는 일을 끌어들여 영적으로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와 관용보다는 율법적 처형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 8: ).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오도하고 있으니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잘못된 오류만 범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도 잘 알지 못하면서 허공에 외치고 있었으니 백성들은 영적으로도 매우 고달파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심이 흉용 하여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대하여 냉정하였고, 못 가진 자는 더욱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부자들에게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회개와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세리들이 횡포도 심하였습니다.
로마 정부에 돈으로 징수액을 할당받아 많은 돈을 징세 하여 착복함으로 서민들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눅 3:7-14).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께 회개하고 “뉘게나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세관에 앉아 징세 하던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세리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그의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병들의 횡포도 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군인들의 횡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참소하지 말고 받는 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착취하고 행패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기다려지는 것은 메시아의 출현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무리들의 몰려들어 그리스도인가 하였던 것을 그 때문이며,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무리들이 모여든 것이나,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오천 명이 모인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구원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할 때, 대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모든 따르는 자들이 베드로를 해치려고 할 때에 바리새인 교법사 가말리엘이 공회 중에 일어나 증거 하는 말 가운데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400이나 따랐다가 드다가 죽으매 쫓던 자들이 모두 흩어졌고,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쫓게 하다가 그가 망할 때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이상한 징조만 보이면 모여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짓밟히고, 마음을 의지할 곳 없을 때, 특이한 일만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인데 자기를 육신 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이렇게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릴 때,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문이 나게 되자 온 예루살렘과 백성들이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동이 일어난 것도 잠시뿐이고, 일부에서 그쳐버리고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백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꼭 오셔야 하고, 어떻게 오셨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신적으로 구원해 주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면서도 영접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있습니까?
백성들처럼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크리스마스트리나 만들고, 캐럴 송이나 신나게 부르고, 선물이나 주고받는 소란이나 피우다가 성탄절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소동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말구유를 찾아가야할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유난히 빛나는 별을 찾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어떻게 오셨는가?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 가를 보고, 듣고,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궁에 오시지 않고, 말구유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잣집에 오시지 않고, 말구유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권세자의 집에 오시지 않으시고, 말구유에 오신 이유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소란하고, 분주하게 떠들고 야단스럽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징글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수다스러운 사람들도 모이지 않은 장소에 조용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71920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70292
4245 박장현 2016.12.05 1346
4244 노재신 2016.12.05 1438
4243 서정식 2016.12.05 1331
4242 노재신 2016.12.04 1858
4241 최범순 2016.12.04 1277
4240 김종태 2016.12.03 1378
4239 최천호 2016.12.03 886
4238 함창석 2016.12.03 1272
4237 노재신 2016.12.03 1450
4236 신원철 2016.12.03 1491
4235 김정효 2016.12.03 1068
4234 홍일기 2016.12.02 1292
4233 민영기 2016.12.02 2254
4232 박영규 2016.12.02 1297
4231 김정효 2016.12.02 847
4230 김정효 2016.12.02 931
4229 유삼봉 2016.12.01 1038
4228 함창석 2016.12.01 893
4227 김성기 2016.12.01 1078
4226 김정효 2016.11.30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