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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이 가난한 자의 복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2-09 10:22
조회
1423
이사야 61:1-3, 마태복음 5:1-3.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지복, 다시 말해서 지상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칼라일”은 어떤 잡지사의 기자와 좌담하는 가운데 ① 자기 일에 분주한 직공, ② 아기를 목욕시키는 어머니, ③ 위급한 환자를 밤중에 수술하는 외과 의사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선과 기도에 힘쓰는 성자도 포함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지상의 행복을 깊이 생각해 보면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거나, 마음이 유쾌하거나, 사랑을 받게 될 때, 행복하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깊이 생각지 못한 평가며 지혜가 부족한 속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 누리는 복, 지복은 깊은 삶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바뀌고 감정에 휩쓸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상태를 비유로 말한다면 바다의 깊은 곳과 같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면 위에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자주 변화합니다.
거센 태풍이 불면 파도가 일고, 폭풍과 바람이 잔잔해지면 파도도 곧 잔잔해 집니다.
그러나 바다의 깊은 곳은 언제나 변함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설교의 시작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이와 같은 깊은 뜻의 복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느끼려 할 때, 이미 사라져버리는 감정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항상 생수와 같이 울어 나오는 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짧은 순간의 행복보다는 오래도록 떠나가지 않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원하고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원한 행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8복의 첫 단계요, 시작이요,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8복에 대해서 영적으로 논리 있게 배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알맞은 순서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빈곤해야 복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면 재산을 모두 다 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일부러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매일매일 노동으로 생활을 하고, 너무 빈곤하여 구걸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성경은 가난하고 궁핍한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천국에 가기 쉽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함이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내게 천 만원이 있으면.......” 하고 생각할 때, 신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요 한 생활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모두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일부러 빈곤한 생활을 해야 복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세상을 등지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물질적으로 가난하여 천국에 가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교의 승려들이 입산수도하며 물질을 멀리하고 고행함으로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물론 부자는 교만해지기 쉬우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부자는 복이 없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이 세상은 온통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할 것이고, 모두가 구걸하는 거지들로 붐빌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했고, 신명기 25:4,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해서 많은 소득을 얻어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빈손으로, 가난뱅이로 태어나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유가 많고 부유한 거부가 되어도, 하나님 앞에는 역시 가난하고 빌어먹는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들끼리 사고 매매하는 땅이나 모든 부동산도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들의 것이 아닙니다.
사고 파는 모든 소유들은 이 땅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의 권리금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소유권이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 소유주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소유한 것은 죄와 허물과 상처투성이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영적 빈곤 속에서 멸망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성들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선한 옥합은 향기 대신에 추한 냄새로 가득하여 졌고, 성령의 항아리 속에는 기름이 바닥나 버렸으며, 진설 되어야 할 떡덩이들은 마르고 부패해져서 먹을 수 없고, 풍성해야 할 우유 통은 인심이 매 말라 버렸습니다.
생명의 구유 통에 넣어진 꼴들은 이미 시들고 말라버린 건초더미에 불과하고, 영혼의 생수통에 있어야 하는 물맛은 시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적 기근과 기갈에 피곤한 영혼들이, 옛날 애굽의 총리 요셉시대에 7년 가뭄을 당한 것처럼, 엘리야 시대에 사마리아 땅에 3년 6개월의 기근과 가뭄을 만난 것처럼, 수 십억의 달란트를 소유했다 해도 쓸곳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요 한 사람은 언제나 부요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언젠가는 부요 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부요 한 사람도 언젠가는 가난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남들처럼 잘 차려 입지 못한다 해도, 영적인 가난이나 부요 와는 상관이 없음으로, 가난하여 부끄럽다거나 아름답게 꾸몄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거룩함과 진리와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함을 자인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탕자처럼, 자신의 생을 방탕으로 세월을 흘러보내고 죄악 된 존재로 살아 왔던 삶과 성숙하지 못했던 삶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죄악 된 세상에서 들림을 받아 일하는 일군들이나 품꾼들 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 왕국의 왕자들 틈에 끼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물질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부요 한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히려 서머나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여도 영적으로는 부요 한 교회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자신이 부요 한 줄로 착각하는 빈곤한 사람들이 많고, 가난한 줄로 아는 영적으로 부요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심령이 가난해 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통회하고 자복하지 않고, 또 자기의 비참함을 알고 겸손해 지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를 위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찾기란 대단히 불가능한 일이며, 범죄 하는 자들을 궁휼이 여기는 것 역시 자신의 영적인 가난을 절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찾기에 너무나 어려운 은혜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천국으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높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깊이 세우듯이, 거룩한 일을 노련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더 높은 믿음을 건축하는 기초 터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으로 부요 한 줄 알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색한 부자 청년을 보시며 슬퍼하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천국 시민의 기본 자세이며 특징입니다.
외부적인 종교적 지위가 복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혜의 제일 낮은 형태야말로 진정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된 터전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벌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강하고 큰 짐승보다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에서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영적인 사람들이 더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다이야 몬드가 큰 바위 산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처럼, 겸손한 은혜의 낮은 단계는 자연 상태의 훌륭함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자”입니다.
먼저 자기를 비우는 작업이 있어야 그 다음에 채우는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릇을 비우지 안으면 채울 수 없습니다.
가죽 부대에 옛 술을 따라내지 않고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새 술을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가죽 부대를 비워야 합니다.

예레미야 1:10,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 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만국 위에 건설하며, 심기 전에 먼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 시므온도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세워지기 전에 먼저 뽑아져야 하고, 흥하기 전에 패함이 있어야 하고, 개심 하기 전에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복을 받을 수 있는 첫 출발이 됩니다.

뉴턴의 말처럼 사람의 지식이란, 한없는 바닷가의 모래 한줌만도 못한 줄을 깨달을 때,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습니다.
비어있는 상태의 마음은 많은 것을 소중하게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욕구에 만족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의사의 칼을 기다림같이,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이 한 그릇의 밥을 사모함같이, 사막에서 목마름에 지친 나그네가 한 모금의 물을 사모함같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사야는 환상을 보고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해지는 마음상태입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는 겸손이라는 말과 일맥 상통합니다.
교만한 마음이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겸손함이 있을 때, 자기 중심이 아니라 빈 마음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죄의 뿌리가 되고 겸손은 덕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의 결국은 진노와 저주를 끌어들이고 겸손함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거두어 드립니다.

잠언 16:18-19,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모를 꾸미는 겸손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겸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힐책하시며 저주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의 교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인정받으려하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같은 겸손은 오히려 교만인 뿐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은 공적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고 기념하려고 할 때, 교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을 의식하고 기대하게 될 때, 그의 심령은 교만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나 전도자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나서서 표면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병든 자들을 치유하실 때에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 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그리스도로 시인할 때,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와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고와 사진들을 걸어서 발표를 하고 표면에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은 숨겨두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자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잘못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보고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하여 교제를 싫어하며 수줍어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어떤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처럼, 생태적으로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항상 뒤로 물러서서 일을 하거나 협력하기를 꺼리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그 모양으로 태어났는지, 심지어 나약하고 용기 없이 행동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속세의 책임을 벗어나라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자기 고유의 개성은 변함이 없다 해도, 주님 앞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노예 성을 만족하고 있는 노예보다 더 비참한 노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적 결핍을 발견하고 깨닫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발견하고 깨닫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빈곤을 압니다.
사람이 솔직히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궁핍을 깨닫게 하실 때까지는, 자기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
육체의 병은 잘 고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교만은 수술을 해도 버리지 못하고 삽니다.
내가 어떤 가정에 태어났던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천성적 성품을 자랑하지 말고, 사회적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바울과 같이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성이나 지성, 그리고 도덕적 행동이라도 믿고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생당하셔서 흘리신 보혈의 피 앞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를 철저히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 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고 체험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밧모섬의 사도 요한처럼,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죽은 자”같이 되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죄인임을 인식하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려면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자비하시고, 용서하시고, 궁휼하시고, 심판하심을 바라볼 때에 자신의 마음이 텅 비는 것처럼 바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만으로 충만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득 차 계실 때, 심령은 가난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심령은 가난하여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한 사도들의 말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임으로 자신이 얻을 것은 사망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범죄한 인간이며, 사망과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한없이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처지의 일을 당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한 발자국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할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만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일컬어 “세리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부요 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 모이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셔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고 감사 할 줄 압니다.
옛날 어떤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높이 평가하고 그리스도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상처 뒤에 숨기고 그리스도의 피로서 목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자신을 두릅니다. 자신의 영적인 간만과 빈곤을 알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여 내게 당신을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만족하겠나이다”하고 부르짖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원망과 만족은 어떤 환경에서나 공존하며 불평과 감사는 어떤 처지에서나 함께 상주합니다.
자연인과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12명의 정탐꾼들의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모처럼 얻은 은혜를 독점하려고 하기보다는 저 산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는 무리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소리였습니다(누가복음 9:28-36).
그러므로 교만함을 가진 자, 야망을 가진 자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오만의 노예이며, 그의 교만함의 농노에 지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높은 마음은 쉼을 얻지 못합니다.
낮은 마음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은 알렉산더나, 시저나, 나포레온과 같이 영웅으로 나타나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의 모습처럼 조용히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와 무능을 깨닫고 잘난 체 하지 않는 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얻으려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의 축복은 하늘의 왕국이고, 하늘의 주권이며, 저 별들 사이에 있는 큰 영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주신 것에 만족하면서 모든 일에 기쁨으로 살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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