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의 과제 극복에 연합하는 한국교회 되길
– 삼일운동 106주년에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목회서신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서명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이로써 세계 곳곳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인식시킨 민족의 거사(巨事)로 역사에 남았으며 올해 106주년을 맞이합니다. 유관순 열사의 죽음 외에도 일경에 의한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학살 사건 등 수많은 감리교인들을 비롯한 한국교회 성도들이 삼일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희생 당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이어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 중심으로 거행된 2·8독립선언, 그리고 68세로 건강했던 고종의 갑작스런 붕어 등으로 항일의식이 고조됐습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운동에 나섰습니다. 개신교(16명)와 천도교(15명)가 주도하고 불교(2명)까지 합세하여 3대 종파 지도자들이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당시 개신교 성도 수가 전체 인구의 약 1.1~1.3% 정도인 20여만 명에 불과했던 점에 비춰 볼 때 1%의 숫자가 몇 달 동안 민족 전체를 ‘만세운동’에 연합하도록 이끈 원동력이 된 셈입니다. 특히 개신교 지도자들 16명 중에 9명이 감리교 목사였을 정도로 감리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3·1독립선언은 개신교와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민족’이란 기치 아래 하나로 뭉친 거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클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나라의 주권을 잃었고 1910년 굴욕스러운 강제병합에 의해 ‘나라 잃음’의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독립이 모두의 소원이었던 1919년, ‘민족’의 이름 앞에 온 백성이 하나로 뭉친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재판 과정에서 일본 재판관들 앞에서도 초지일관한 자세로 ‘독립선언’의 뜻을 굽히지 않아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감리회의 이필주 목사님은 “나 하나가 죽어 우리 민족 전체의 자유가 회복된다면 이 몸이 열 번이라도 죽고 백 번이라도 죽겠다. … 하나님을 찾고야 비로소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일할 바를 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후손에게 큰 울림을 주셨습니다.
106년이 흐른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습니다. 사회를 향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회 영향력은 선교 초기에 비해 약해졌습니다. 원인을 정확히 인지한다면 처방이 유효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어떤 부족함이 있는지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주장하는 자세에서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같은 목표인 ‘하나님나라’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연합’을 이뤄내야 합니다. 남북통일, 기후재앙과 생태위기(창조질서 보존), 극한 이념의 대립과 갈등, 저출산 극복 등 민족의 공통된 문제에 깊이 고민하며 ‘하나’된 모습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한복판 파고다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몇 달 동안 ‘삼천리 금수강산’을 뒤덮었던 감격이 되살아나는 삼일절 기념일을 다시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감리교회의 ‘하나됨’을 소망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