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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고전 12:7-11) cf. 빈야드⇒알파⇒신사도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5-08-12 13:24
조회
1271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목적에 대해, 【7】그러나(원문의 첫 부분에 데, δὲγὰρ가 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는 ‘다양한 은사들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이란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신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런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C. Hodge). 즉,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 교인에게는 이런 은사를, 저 교인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개인의 야심이나 허영, 자기 과시, 분쟁 조성, 형제에 대한 멸시 등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봉사와 섬김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8절 이하에 아홉 가지의 성령의 은사를 열거하고 있다. 은사 하나 하나를 주석하기 전에 먼저 핫지(C. Hodge)의 견해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은사들의 열거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던 모든 형식들을 망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이 언급되어야 한다. 이 목록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은사들이 다른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롬 12:4,-8과 본장의 28절을 참조하라).
둘째, 비록 사도가 이 은사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될지라도 분류의 원리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떠한 은사가 어떤 한 부류에는 속하고, 다른 한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이제까지 제안된 분류의 서로 다른 양식들은 실제적인 차이에 근거하고 있을 때조차도 사도에 의해 제시된 배열에 적용될 수가 없다. 그 은사들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사들은 모두가 초자연적인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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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록 동일한 정도나 동일한 형식에 의한 것들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거기에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은사들과 같은 평범하고 영속적인 성령의 은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적적인 것이거나 최소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것은 결코 언급하고 있지 않는 이 은사들의 목록 속에 들어 있지 않다. 네안더(Neander)처럼 이 은사들은 말씀에 의해 실행된 것들과 행위들에 의해 실행된 것들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의 부류에는 지혜, 지식,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이 속하고, 후자의 부류에는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영들 분별함 등이 속한다. 또한, 심리학적인 분류, 즉 은사들의 행사에 수반되는 서로 다른 기능들에 근거한 분류를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이 은사들은 감정들에 관계된 은사들, 지성에 속한 은사들 및 의지에 관련된 은사들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아주 임의적이고 독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러한 기능들은 각 은사의 실행에 관계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류의 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본문에 나와 있는 것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은사의 종류에 대해, 【8】[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이라고 열거하고 있다.
[지혜](소피아스, σοφίας)와 [지식](그노세오스, γνώσεως)에 대해서는 (1)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는 설(C. K. Barrett), (2) 이미 소유한 안정된 지혜와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설(Godet),① (3) 보다 넓고 깊고 높고 영원한 것과 단순히 보이는 것이라는 설(J. A. Bengel), (4) 기독교의 특전적인 것과 보다 낮은 것이라는 설(Edwards),② (5) 사람의 영에 속한 것과 지성에 속한 것이라는 설(F. W. Farrar), (6) 더욱 포괄적인 용어로 존재하는 사물을 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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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in 이상근.
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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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그 참 가치를 아는 영적 통찰력 및 이해력과 복음의 원리들에 대한 지적 파악이라는 설(A. Robertson and A. Plummer), (7)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이라는 설(Hofmann),③ (8) 영원한 것과 임시적인 것이라는 설(Meyer),④ (9) 사도들이 받은 영원하고 완전한 영감과 선지자나 교사들이 받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영감이라는 설(C. Hodge), (10) 하나님의 경륜과 사람의 마음을 깨닫고 인사(人事)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도하는 능력과 복음의 교의를 깊이 이해하고 넓게 모두 아는 것이라는 설(黑崎幸吉), (11) 판단이나 실행에 있어서 우리의 지식을 적용하는 능력(Whedon)⑤과 자연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 또는 신비한 일 등을 아는 것이라는 설(D. S. Metz), (12) 내적이고 근본적이고 영적인 것과 외적이고 구체적이고 임시적인 것이라는 설(이상근), (13)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직관 및 지각과 이를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라는 설(김용옥), (14) 복음에 대한 영적 이해와 복음에 대한 영적 변증 및 해설이라는 설(박윤선), (15) 하나님의 지혜인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성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통찰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설(G. D. Fee), (16) 초자연적 비밀들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최고의 지적 탁월성이라는 설(W. Carter), (17)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사무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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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동.
4) 상동.
5) in D. S. M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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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 파악이라는 설(J. Calvin), (18) 복음적인 구원의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구약성경의 유형과 예언을 이해할 능력이라는 설(J. Wesley, A. Clarke), (19) 영적 진리에 대한 깊은 영적 통찰력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력이라는 설(T. T. Shore), (20) 구원 계획에 대한 현명하고 사려 깊고 이해력 있는 소견과 구원 계획이나 종교의 교리 또는 의무에 대한 분명한 소견이라는 설(A. Barnes) 등이 있다.
위의 견해들은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으나, 여기서의 특수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1:23-25, 30, 2:7-8)와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이며, 일반적인 의미는 영적 사물이나 물질적 사물에 대한 통찰력 및 그에 따른 실행력과 영적 사물이나 물질적 사물에 대한 이해이다(1:5).
[말씀](로고스, λόγος)은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또는 지식을 담아 전달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9】[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이라고 하였다.
[다른 이에게는](헤테로, ἑτέρω)은 부차적인 구분을 표시하는 [어떤 이에게는]과 달리, 중요한 구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고, 마지막 두 가지인 방언과 방언 통역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며, 방언과 방언 통역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여기의 [믿음]은 이미 믿고 구원받은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언급된 것이므로, 구원받은 첫 믿음이나 성실한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불변의 믿음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믿음인 경이로운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13:2, 마 17:20, 21:21, 고후 11:23-33).
[병 고치는 은사]는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사도 이후 초대 교회(마 10:1, 행 5:12-, 8:7, 28:8 등)와 현재에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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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병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거나(막 6:5, 행 28:8), 기름을 바르거나(막 6:15, 약 5:14), 말씀으로써(행 3:1-10, 9:34, 14:10) 병자를 고쳤다.
끝으로, 바울은 【10】[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고 하였다.
[능력](뒤나메온, δυνάμεων: 1:18의 주석을 보라.) [행함](에네르게마타, ἐνεργήματα: 12:6의 주석을 보라.)은 병 고치는 은사 외에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 예로 귀신을 쫓는 일(마 7:12, 9:33, 10:8, 막 3:15, 9:38, 16:17, 행 8:7, 16:18 등),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행 5:1-10)나 박수 엘루마를 징계한 일(행 13:8-12) 등을 들 수 있다. 이 은사뿐만 아니라, 이하의 모든 은사도 병 고치는 은사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예언함](프로페테이아, προφητεία)은 11:4의 주석을 보라.
[영들 ‘분변함’](디아크리세이스, διακρίσεις: 11:29의 주석을 보라.)은 은사의 작용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성령은 말할 것도 없고, 악령들도 인간의 지각 및 지혜가 미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작용하는 현상만 보고는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참조: 14:29, 마 24:23, 행 19:13, 살전 2:2, 요일 4:1-6). .
[다른 이에게는]은 9절의 경우와 같다.
[각종 방언 말함은]은 고린도 교인들이 매우 자랑삼던 은사 중에 하나이었다. 이 방언을 말하는 은사는 말하는 사람들이 전에는 몰랐던 언어들로 말하거나(막 16:17, 행 19:6), 찬양하는 능력이다(14:15). 대체로 기도 중에나 어떤 황홀한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방언을 하게 되는데, 남들이 알아듣는 경우(행 2:4-11, 10:46)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14:2).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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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로 후자에 속하였다.
[방언들 통역함]은 방언을 통해 어떤 하나님의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자신과 남들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는데, 이것 역시 성령의 은사이다. 때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14:13).
결론적으로, 바울은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열거한 다양한 모든 은사는 그 종류와 현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그 근원은 같은 한 성령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은사이든 간에 “각 사람의 요구와 역량에 따라서 적당하게 분배되는 것”(김용옥)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서 필요하다고 여긴 사람이나 적합하다고 여긴 사람에게 분배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 데에는 인간의 믿음의 기도가 요구된다. 이 성령의 은사를 한 가지만 받았든 두 가지 이상을 받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신 성령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다양한 모든 은사가 서로 조화되어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은사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을 위한 방편이며 도구라 할 수 있다.

#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년 2판 1쇄), pp. 348-3530.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전체 3

  • 2015-08-12 13:31

    부언: 예언을 하는 자는 프로페튜온(προφητεύων)으로서 {“πρό(프로: ‘앞으로’, ‘밖으로’)와 φημί(페미: 말하기)가 결합된 말이다.……그리고 선지자(예언자)가 앞을 향해, 또는 밖을 향해 말하거나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다. 그는 선포자이지 반드시 예고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W. Hendriksen).}(살전 5:20의 주석). 선지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신 18:19, 20).
    신약 시대의 예언자(선지자)에 대해서 {렌스키(R. C. H. Lenski)는 “예언과 예언자는 이미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언자는 교사이기도 하며, 전도자요 목회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행 21:9-10)과 같은 예언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장차 오는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 계시를 전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는 물론, 신약성경의 사도들보다 하위에 위치한다. 그들의 기능은 부수적이요, 그들의 계시는 어쩌다 있었으며, 또한 그 숫자에 있어서도 소수에 불과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2:2의 주석).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사실이다(14:32).


  • 2015-08-13 17:58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 교인에게는 이런 은사를, 저 교인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개인의 야심이나 허영, 자기 과시, 분쟁 조성, 형제에 대한 멸시 등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봉사와 섬김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혜로운 귀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하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 2015-08-14 11:27

    김정효 장로님, \"은혜로운 귀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하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라고 하셔서 필자 역시 장로님께 감사하며, 글(성경 주석)을 등록하는 보람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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