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틴 부버의 불타 비판
작성자
현종서
작성일
2015-09-29 07:20
조회
1052
말틴 부버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관계 이것은 인간이 상대(사물, 다른 인간, 절대자= 하나님:영원자 너)와 가지는 관계및 대화의 형식이라 말함으로 철학계와 신학계에 큰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부버는 '나와 너" 라고 하는 그의 주저에서 "영원자 너"를 다루는 장에서 불교의 불타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다." 불타는 그의 목적지를 "고(고통)의 적멸(완전히 없엠)이요 윤희로 부터 해탈이라 본다. --- 윤희가 정말 있는 지 모른다.그리고 있다 해도 불타가 윤희의 필연으로 부터 해탈케 하는 목표에 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을 지를 알지 못한다.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예비적 단계인 "범아일여"의 경지로 인도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는 우리가 이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억견과 갈등으로부터 떠나기를 종용할 뿐만 아니라 형체의 미망으로 부터도 떠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형체(현실 세계)는 결코 미망이 아니다.도리어 믿음직한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는 불타의 길 역시 어느 대상에 대한 무관심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대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타가 육체의 내적 현상에 의식을 언급할 때에도 ,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감각적 확실성을 수반하는 육체의 의식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와는 거의 정반대의 것(정신의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타는 범아 일여의 깨달음에 들어간 사람들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너'관계의 경지에 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불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에게서 '너'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버리려는 결심이 도사리고 있었다고추정된다. 자기는 다른 사람(제자)들에게 '너' 라고 말 할 줄 알았으나 그들(제자들)에게 그들의 타자에게 '너'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나-너'의 관계에 마주 선다는 것은, '무릇 삶을 가진 모든 것은 다 내 이 가슴속에 끝없이 간직되어 있도다' 라는 자기의 자비와 연 (이론)과 멀기(다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불타는 저의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의 근저에는 저 근원자를 향하여 '너'라 고 부르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응답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보니 붙타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이,'근원자'(하나님) 대신 불타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영원자 너,를 부르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의 착각
대아의 몰입에 관한 온갖 가르침은 "정신은 대상(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그 내부에 작용하는 것, 즉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다.'라는 큰 착각에 근거하게 되었다. 실제로 정신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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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버의 진술들은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좋은 통찰 점을 제시한다고 본다. 철학이나 타종교에서 구원이라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의 발견이며 하나님 발견의 기본자세 일뿐 그 이상이 아니다. 자기의 죄인됨의 발견-하나님앞에서 회개는 필연이다.
소크라 테스의 " 네 자신을 알라."는 말도 인간자신의 한계를 알라. 너는 신이 아니다.는 말로 결국 "신을 찾으라"는 말이었다. 모든 철학과 종교는 결국 참 하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터 닦음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부버는 '나와 너" 라고 하는 그의 주저에서 "영원자 너"를 다루는 장에서 불교의 불타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다." 불타는 그의 목적지를 "고(고통)의 적멸(완전히 없엠)이요 윤희로 부터 해탈이라 본다. --- 윤희가 정말 있는 지 모른다.그리고 있다 해도 불타가 윤희의 필연으로 부터 해탈케 하는 목표에 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을 지를 알지 못한다.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예비적 단계인 "범아일여"의 경지로 인도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는 우리가 이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억견과 갈등으로부터 떠나기를 종용할 뿐만 아니라 형체의 미망으로 부터도 떠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형체(현실 세계)는 결코 미망이 아니다.도리어 믿음직한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는 불타의 길 역시 어느 대상에 대한 무관심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대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타가 육체의 내적 현상에 의식을 언급할 때에도 ,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감각적 확실성을 수반하는 육체의 의식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와는 거의 정반대의 것(정신의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타는 범아 일여의 깨달음에 들어간 사람들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너'관계의 경지에 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불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에게서 '너'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버리려는 결심이 도사리고 있었다고추정된다. 자기는 다른 사람(제자)들에게 '너' 라고 말 할 줄 알았으나 그들(제자들)에게 그들의 타자에게 '너'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나-너'의 관계에 마주 선다는 것은, '무릇 삶을 가진 모든 것은 다 내 이 가슴속에 끝없이 간직되어 있도다' 라는 자기의 자비와 연 (이론)과 멀기(다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불타는 저의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의 근저에는 저 근원자를 향하여 '너'라 고 부르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응답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보니 붙타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이,'근원자'(하나님) 대신 불타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영원자 너,를 부르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의 착각
대아의 몰입에 관한 온갖 가르침은 "정신은 대상(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그 내부에 작용하는 것, 즉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다.'라는 큰 착각에 근거하게 되었다. 실제로 정신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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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버의 진술들은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좋은 통찰 점을 제시한다고 본다. 철학이나 타종교에서 구원이라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의 발견이며 하나님 발견의 기본자세 일뿐 그 이상이 아니다. 자기의 죄인됨의 발견-하나님앞에서 회개는 필연이다.
소크라 테스의 " 네 자신을 알라."는 말도 인간자신의 한계를 알라. 너는 신이 아니다.는 말로 결국 "신을 찾으라"는 말이었다. 모든 철학과 종교는 결국 참 하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터 닦음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최고의 휴머니스트? 여기 죄의 개념은 없다. 절대자, 영원자, 구원자 너를 바라보게 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기이다. 성령을 모르는 자, 거듭남을 모르는 자, 영원자 너-질적인 차이속에 계시나,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지를 보이신 분,(그의 약속과 성취의 기록인 성경을 부정) 기독교는 특별한 구원의 길이 아니라 타종교도 구원의 길이 될 수 도 있다.(성령이 역사하시니?- 삼위일체의 삼위로서의 거룩한 성령과 타종교속에 역사하는 샤마니즘의 영과 같은 것인가? 성령이 그의 몸을 성전 삼고 있는 성령이 자기 영과 더불어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내적 증거가 있는 이의 말이라 할 수 있을 까?
성령은 말씀을 부정하지 않고 말씀과 함께가며 말씀을 세우고 깨닫게 한다. 변선생을 사랑하고 배웠다는 이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나? 변선생이 안 가르쳤나? 가르쳤으나 제자들이 못 배웠나?
구례 화엄사에 보관 중인 불경 나마다경(38:8) 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석가모니의 예언적인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何時 爺蘇 來 吾道 無油之 燈也
하시 야소 래 오도 무유지등야
이 말은 놀랍게도 \"언젠가 예수께서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이 쓸모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석가가 입멸하기 전 최후로 한 설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성철 스님 돌아가시기 직전의 자기가 속았다고 하는 고백록은 우리 기독인들이 참고하며 불교인들과 사이좋게 지내자고만 하지말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꼭 건져 내고자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들을 전도하는 일이 제국주의적인 횡포일까요?
성철스님은 기독교계의 연구대상입니다
그 의 마지막 뉘우침과 회개 구원,
그의 임종계를 통한 불교도들의 전도 등은 이교도들을 향한 복음의 도구가 될
충분한 소재가 담겨있습니다
성철스님은 1993.11.4.에 돌아가시며
자기가 돌아가실 곳을 알고,깨닿고 유언으로 아래와 같은 고백을 하였고,당시 조선 동아 경향신문에 게재된 내용소개
\"한평생 무릇남녀를 속였으니
죄업은 하늘에 넘치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천갈래 만갈라
한 덩이 붉은 해는
서산에 걸렸네\"
그 분은 자기가 돌아 갈 길을 알고
깨달음의 고백인 것 같군요
우리민족은 태고적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으로
언어에서도 영적의미가 담겨있지요
인간의 본향이 하늘이기에 죽음에 대한
표현이 \"돌아가셨다\"라는 말로서
우리민족은 창조섭리를 아는 민족입니다
인간을 세상으로 보내 준 곳으로
다시 갔다는 의미 이지요
모타로 불타까지 비판을.
빛은 빛에서 와서 빛으로 살다가 다시 빛으로 돌아감 이상이하도 아니조.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