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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을 위한 기도

작성자
최범순
작성일
2016-01-06 13:43
조회
2444
새벽기도가 없는 토요일 아침,
목양실에서 인터넷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공복에 마시는 커피가 위장에 해롭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몸이란 게 기계와는 달라서,
기분에 따라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니,
기분 좋게 마시면 그 해로움을 조금은 덜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

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가 이렇게 커피 향과 음악에 젖는 것은,
아직 덜 깬 나를 깨우기 위함이다.
분주하고 각박한 세상 속으로 거칠게 나를 몰아넣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만들려는 의도다.
그래서 눈을 감고 향기와 가락에 취해 있노라니,
문득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옆 CCTV를 보니,
웬 초로의 할머니가 두리번거리면서 들어와서,
신발장 옆의 박스를 들고 서둘러 나간다.


당장에 달려 나가고 싶다.
붙들어서 야단을 치고,
사과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기로 그 박스에는 값나가는 물건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만 이 곳이 도둑들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다.
너무나 빈 틈 없이 완벽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빈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기대를 할 수 있는 교회마저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저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오늘날 교회마다 별별 희귀한 명분을 내세워서 수익사업에 골몰하는데,
그보다는 ‘도둑맞기 위한 교회’로 존재할 필요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안식년은 ‘도둑맞는 해’ ‘도둑맞으라는 주의 명령이 내려진 해’ 아닌가?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애굽기23:10~11)

7년에 한 번은 내 땅의 소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도둑맞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빈틈을 보이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둑맞고,
손해보고, 양보하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게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오늘 이 땅에서는 피해를 입고도 거대 자본의 힘에 밀려서 재판에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을 죽게 만든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의 벌이 내리지 않을까?
그렇게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면서도,
교회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웃기는 얘기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 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5:21~24)

손해를 보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세상에 오셔서,
온 몸으로 손해를 보신 주님임을 생각하면,
빈 박스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기분 좋게 도둑맞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폐지 값도 말이 아니라는데,
저거 가지고 가 봤자 십 원이나 받을까?
그 값싼 박스 하나 가져가기 위해 노인의 몸으로 숨을 죽이고 이 건물에 들어오신 할머니,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이셨을까?
그 분을 위한 연민의 정이 솟아나서 기도한다.
오늘은 제발 저 할머니의 하루가 편하고 행복하기를!

그리고 내일은 같은 자리에 빈 박스만 놓아두지 말고,
그 안에 따뜻한 베지밀이라도 한 병 놓아두어야 하겠다.
큰 돈 안 드는 건데,
쌀이라도 한 됫박하고..,
아니지! 그냥 지폐 한 장 놓아두면 좋겠다.
대신에 자신의 존재가 발각된 걸 알고 놀라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체 3

  • 2016-01-07 22:36

    감동이네요!
    성서적 믿음의 열매가 보이는 글에 ~~^^


  • 2016-01-08 06:03

    감동을 드릴 자신도 능력도 없고요,
    다만 오랜만에 찾아와서 일상의 소견 한 번 올려 보았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 2016-01-09 17:40

    종종 들리셔서 좋은 글 올려 주세요.
    제 기억으로는 올 곧은 글을 쓰시는 분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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