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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와 천연정

작성자
이주익
작성일
2016-02-03 07:43
조회
3525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천연정

천연정(天然亭)은 도성 밖 서지(西池), 서쪽 가에 있던 정자(亭子)로, 18세기 중엽 세워져 경기 중영(京畿 中營)의 부속 건물로 사용됐다. 천연정은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호화별장식 공원 정자로 서울의 3대 왕실 중 하나에 속한다.

연못은 현재,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초등학교(1924년 개교) 자리가 되며 정자는 동명여자중학교(1921년 개교) 어딘가 이다. 서학의 대부 정제두(1649-1736)의 양명심학자들의 본거지였다.

1890년을 전후하여 한국 감리교회가 인근을 매입하면서 개축해 선비들의 학문 토론장을 겸한 연회장이었다.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은, 연산군(燕山君, 1476-1506)에 이르러 문을 닫는다. 연산은 사직의 기둥 서거정(1427-1488)에게서 세자의 학문 기초를 닦았으나 학구열이 못 미쳤고 유교 이념을 배척하면서 트라우마 누적이 폭군으로 변신하게 돼, 바른말 하는 훈신 노사신(1437-1498)을 죽였고 외할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훈신 성현(1439-1504)을 같은 해 죽게 한다. 숨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었던 연산군 폭정시대를 만들었다.

조광조(1482-1519)는 동국을 통감하고 동국의 빛으로 경국대전을 수행했다. 성리학을 토대로 문치했고 재행을 겸한 젊은 선비 120명을 등용해 홍문관과 사간원을 장악했다.

시종을 엄선해 임금으로 하여금 철인군주로 경국대전대로 통치하도록 보필했고, 미신을 타파했으며 양풍미속을 기르고 향약을 지키도록 했다.

기성귀족을 소인배로 몰고 공신 76명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죽음은 이 땅에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씨를 뿌리게 했고 그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

이건창(1852-1898)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붕당지쟁(朋黨之爭)에 무너질 붕(崩)으로 표기했다. 서거정 이후 최고의 훈구대신 이준경(1499-1572)이 조광조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양파 간 화해하지 않으면 붕당이 갈려 당쟁으로 이 나라는 망한다고

유차(遺箚)한 3년 후, 1575년 동인과 서인이 갈렸다. 이준경이 조광조가 뿌린 씨는 남겨야 한다는 말이 두둔으로 오해된 것이다.

이조(吏曹)에 5급 품과 6급 품의 전랑(銓郞)직이 있었다. 하급 말단이지만 당하 종삼품 이하 문신의 추천권과 후임자 자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리다. 재상이 독주하는 체제를 견제하기 위한 자리로 임금의 인사권을 반분해가졌다.

이 말직에 김효원(1532-1590)과 심의겸(1535-1587)이 세력을 형성한 게 다툼으로 발전된 것이 동인(김효원은 동쪽 건천동, 신진사림파)과 서인(심의겸은 서쪽 정릉방, 기성사림파) 간 파쟁의 시작이다.

당쟁은 두문불출의 사림이 벼슬을 탐하면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사림파가 막강한 훈구파와 싸울 때에는 단결하나로 훈구를 무너트린다.

그러나, 사림이 집권하면서 기호의 선배당(서인)과 영남의 후배당(동인)으로 시작해, 우세한 동인이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득세한 북인이 화담학단과 연립, 4분5열로 싸웠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득세한 서인이 송시열의 노론과 조지겸, 윤중 등 신진소론으로 대적됐다. 그리고 끝내 나라는 망했다. 지금, 냉천동 감신대와 한국 감리교회가 다를 바 없다.

새로운 나라는 사림의 뿌리인 보성 가은당(可隱堂)과 강화 명미당(明美堂) 사림에서 움 텃다. 명미당 사림은 서대문 천연정에서, 가은당 사림은 최익현을 앞세웠고, 실세로 서재필을 내세웠다.

당시 사림이 내세운 재목은 명미당 이건창, 사가정에서 이시영, 이범수, 이상설, 이동휘 등 6인이 고종 황제로부터 건국의 대명을 받았다.

이건창이 1898년 죽고, 최익현이 1906년 죽은 후 사림의 기둥들은 해외에서 건국을 서둘렀다. 서재필은 가은당 실인 이기대의 외손자로 서거정의 실인이다. 1896년 건양원년에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가 창설되어,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주도해 민주 시민운동으로 이 땅에 삼권이 분립된 민주독립 국가건설을 주도했다. 아펜젤러, 헐버트, 최병헌, 전덕기, 이준이 주역이다. 모두 다 한국감리교회 입교인이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이건창이 천연정을 들러 학표(學表)를 남겼고 한국학을 이어받은 선비가 ‘최병헌의 탁사정, 협성서북학파’이다. 이 학파에서 최초의 대학 서북협성학교, 한성사범학교, 오성학교, 건국대학이 태어난다. 한국학(강화학)은 한국 감리교회 영성의 실존(신학)이 되었다.


2016년 2월 3일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



전체 5

  • 2016-02-04 11:14

    몇 해전 제천시 관계자들이 교단 역사자료실을 방문 탁사의 자료를 촬영하길래..
    탁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데 타종교에서 왜 특정 종교인 긴념관을 건립하느냐 따지는 이들이잇어..
    제가 그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 줫어요.

    탁사는 성호의 실학과 하곡의 양명학을 이미 학습한 이로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고.
    그는 개종하기전 이미 개화되어 잇엇던 이라고.


  • 2016-02-04 11:21

    정몽주 - 성호 등의 실학 - 북학파 - 강화의 양명학자(하곡 정제두, 이건창, 이건방, 이건승 등),이시영, 이회영, 이상설, 이준과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들과 운영자들.
    감리교회 무장운동 진영의 면모는 그 이전 이들의 파악만으로 가능.
    뿐만 아니라 개화와 개종 자체[가 실학과 양명학. 만일 사전 이러한 준비가 없엇다면 개화는 없엇을 것.

    가우쳐 맥클레이 아펜이나 스크 모자가 중요한게 아닌데.


  • 2016-02-04 13:15

    민관기 목사님이 간직한 한국학(영성학)의 계보를 엄선한 약사라도 시기가 맞으면 감게에서 교습해 주시면 좋아하는 청중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감리교회를 아끼고 감신대를 위하는 마음이 흔들이지 마시고 지적해주세요. . 고맙고 감사합니다.


  • 2016-02-05 09:28

    이주익 목사님, 이번에도 역사 지식을 얻게 하시고, 또한 당파 싸움이라는 악습이 현재에도
    신학교와 교단에 존속되고 있는 것을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관기 목사님, 갖춘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6-02-05 21:50

    최세창 목사님, 감게의 후배들에게 격려의 본이 되시는 후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실히 살고자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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