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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의 두 영웅!

작성자
이주익
작성일
2016-03-01 10:17
조회
5797
3.1독립운동, 한국 감리교회 두 영웅!

첫째, 3. 1절 만세운동 당시의 동태

일제의 침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자주독립 사상은,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정신이 민족애로 분출된 숭고한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독립을 외친 항일투쟁사를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당시의 동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회 내에서는 1919년 1월 말~2월 초에 걸쳐 손정도 목사가 이승훈, 양전백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협의한 후 평양, 선천, 정주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조직화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2월 7일 이승훈이 연합전선을 펴자는 천도교 측 최린의 연락을 받고 상경(上京)해 천도교와의 연합을 추진했다.

이때쯤 YMCA 간사인 박희도, 세브란스 병원 제약주임인 이갑성 등과 강기덕, 김원벽 등 전문학교 학생대표들도 독립운동계획을 협의했다. 학생단은 처음 학생들 단독의 독립시위 운동을 계획했으나,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합전선을 준비하던 종교계에서 합류할 것을 종용, 이에 합류했다.

2월 24일 한용운, 백용성 등 불교계까지 포함한 범종교계 중심으로 민족 대연합전선을 이룩하고 구체적 독립운동 추진방침을 결정했다.

2월 10일 평북선천에 있는 남강 이승훈에게 천도교 측에서 김도태를 보내 서울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전달됐고, 2월 12일 서울에 도착한 이승훈은 박승봉, 송진우 등을 만난 후 평양으로 가서 감리교회 손정도 목사와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 장로교 길선주 목사를 만났다.

손정도 목사를 통해 3.1 운동 거사를 전해들은 신홍식 목사는 2월 15일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에 있는 이승훈을 만나 상세한 계획을 모의한 후 곧바로 서울로 와 남대문 밖 신행여관에 유숙하고 있는 감리회 정춘수 목사를 만나 뜻을 전했으며, 정춘수 목사는 2월 16일 종로교회 오화영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전하고 함께 YMCA로 가 박희도 간사를 만났다.

2월 17일 정춘수 목사가 유숙한 신행여관에서 정춘수, 박희도, 오화영 목사와 함께 인천 우각리교회 오기선 목사를 만났다. 또한 신홍식 목사는 2월 18일 Y.M.C.A. 박희도 간사를 만난 후 오후 7시 박희도 간사의 집에서 정춘수, 오화영, 신홍식, 박희도와 함께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2월 19일 감리교와 장로교 측 합석회의가 이갑성의 집에서 있었다. 참석자는 신홍식, 오기선, 정춘수, 오화영, 이승훈, 박희도 등이었다.

2월 21일 신홍식 목사는 평양지역 독립운동 확산을 위해 평양으로 귀임했고, 22일과 23일에 오화영을 개성으로, 이갑성을 경상도로 파견했다.

2월 24일 해주교회 최성모 목사와 YMCA 박희도 간사가 만나 거사에 참여키로 했고, 한용운, 백용성 등 불교계까지 포함한 범종교계 중심으로 민족 대연합 전선을 이룩하고 구체적 독립운동 추진방침을 결정했다.

2월 26일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를 만난 후 오후 2시 한강 인도교에서 모인 기독교 측 대표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는 이필주, 오화영, 최성모, 박희도, 함태영, 이갑성이었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 대표를 결성, 서명식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서 가지기로 함에 따라 2월 27일 정오 이필주 목사 집에서 기독교 대표들의 서명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가 처음 공개됐다.

참석자는 감리교 측 이필주, 오화영, 최성모, 신석구, 신홍식, 박동완, 김창준, 박희도였고, 장로교 측 이갑성, 강기덕, 김원벽이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들도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장로교 측 5명은 이승훈 선생에게 인장을 맡겨 와 서명시켰다.

5명은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이었고 함태영은 거사 뒤 일을 맡기기로 하고 서명에서 제외되었다. 2월 28일 기독교 측 등 민족대표 최종모임이 손병희 선생 집에서 있었다.

학생단은 처음 학생들 단독의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합전선을 이룩하고 구체적 독립운동 추진방침을 결정했다.

둘째, 탑골공원의 두 영웅, 이규갑과 정재용

거사 일을 3월 1일로 정하고, 선언서는 최남선에게 기초하도록 했으며,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종단별로 선정한 것이 33인이었다. 그 대표 가운데 기독교계 인사가 16명이었다.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화영,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김창준,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등이었다.(감리교회 10인) 그 후 천도교에서는 보성사에서 선언서 21,000여 장을 인쇄해 종교계, 학생단을 통해 각지에 배포했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장소가 탑골공원으로 결정됐으나,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나 일제군경의 교란을 우려한 박희도의 제의에 따라 하루 전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당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의 선언식과 시민, 학생들의 선언식장소가 달라지게 돼 약간의 혼선이 있게 됐다.

탑골공원에 약 5천여 명이 모여 33인 대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군중들은 33인 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 강기덕은 태화관으로 가 33인 대표가 파고다공원으로 가지 않으면 권총으로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할 정도였다.

모든 광경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평양감리교회 이규갑 전도사( 서대문교회 설립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주 교회학교 교사 정재용(鄭在鎔)의 손을 붙들고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탑골공원에 운집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표정은 긴장과 불안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규갑 전도사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해주 청년 정재용에게 어서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라고 강권했다.

정재용이 주머니 안에 간직한 선언서 한 장을 꺼내 들었으나 그가 전날 밤 읽어보았을 때 한자(漢字)가 너무 많아 잘 읽지 못할 것으로 망설였다.

그러나, 정재용은 상황의 급박함을 인식, 주저할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팔각정 단상(壇上)으로 올라섰다. 단(壇) 정면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10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정재용은 감격어린 열띤 음성으로 한 줄 한 줄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기백은 하늘을 삼키는 듯 땅을 삼키는 듯 했다. 순식간에 장내의 한 모퉁이에서 분격에 사로잡힌 오열의 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민족대표 33인의 호명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각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태극기를 든 수십만 군중은 “대한독립 만세”를 계속 고창(高唱)하면서 공원으로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시위대는 학생, 시민들로 확산돼 독립만세 시위에 돌입했다.

시위군중은 만세를 외치며 종로를 거쳐 덕수궁 앞에 이르렀고 대한문(大漢門) 안으로 들어갔다. 3.1 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통보를 받고 출동한 일경(日警)에 자진 체포됐다.

같은 날 독립만세운동 대표들의 선언식과 시위는 서울 뿐만 아니라, 사전(事前) 조직화가 되어 있던 평양, 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도 일어나 급격히 전국으로 확산됐다.

시위 초기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3월 중순경까지 전국으로 파급됐다. 시위 양태도 초기에는 독립선언서 격문배포, 집회 만세시위, 행진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됐으나,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폭력적 유혈 탄압에 맞서, 헌병, 경찰, 군청, 면사무소, 우편국 등 식민 통치의 말단 기관들을 습격, 파괴하는 등 폭력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2016년 3월 1일

서울연회 서대문지방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



전체 10

  • 2016-03-01 10:23

    이주익 목사님, 때에 맞춰 요긴한 글 잘 읽고 감사합니다.


  • 2016-03-01 10:34

    최세창 목사님의 성경주석은 더욱 유용한 양식입니다. 감사합니다.


  • 2016-03-01 10:54

    참여 순서는 달랐을지라도 이 정신에 동참하여 고난을 감수했던 모든 분들은 그 시대의 영웅일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도 자랑스러운 선열이요 세계에 큰 교훈을 안겨준 분들이다. 우리 대한 민족은 다시 이 삼일 만세 정신으로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아직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 통일을 이루기 까지 독립을 이루었다고 생각 말라. 현순과 그의 망내 아들 현 다윗이 그 메시지를 수년전에 다시 일깨워주었다. 상해 임정은 이 삼일 정신을 바탕 위에 세워 진 것상해임정의 정신을 이은 국가가 한반도의 정통 국가이다. 무엇이 자주인가? 무엇이 자주인가? 무엇이 자주인가? 한반도 국가의 자주는 그 무엇인가?
    저 강대국들 틈바구니속에서 자주성을 지키며 세계에 공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우리 국민들은 고민해야 한다.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주와 역사의 창조 지배자와 한 배를 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선조들은 민족복음화가 통일의 길이라 하였던가? 기독인들조차 악마와 타협하라는 거짓 평화주의에 속지말고 길,진리 빛이신 그리스도께 이 민족의 장래를 위탁해야 한다.


  • 2016-03-01 15:55

    3․ 1독립운동, 한국 감리교회의 두 영웅
    파고다공원의 한국 감리교회 두 영웅, 정재용과 이규갑
    97회 3.1운동, 두 감리교회의 영웅에 대해서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 2016-03-02 08:00

    귀한 글 고맙습니다. 옥의 티라면 파고다 공원이 아닌 탑골 공원입니다.


  • 2016-03-02 15:30

    \"파고다 공원\"
    민족정기의 산 교육장이자 근대 도시공원인 \'파고다 공원\'은 1991년 10월11일 \'탑골공원\'으로 명칭이 확정되었으며, 2011년 7월28일 \'서울탑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2016-03-05 18:24

    이순신의 후손 이규갑.


  • 2016-03-05 19:11

    함안나 여사, 이규풍 장군 등 독립유공자 5명인집안.
    목사중 권총든 목사.


  • 2016-03-07 17:17

    1945년 11월 16일(주일) 감리회 총리원 전도국 총무로 시무하던 이규갑 목사가 월남하여 목자를 찾아다니는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감리교신학교 부속주택(자택)에서 이규갑 목사와 김앨라 사모, 최서중 장로, 남경순 장로 등 12명이 교회를 창립, 교회 명칭은 임시로 동 이름을 따서 \'냉천동감리교회\'로 정했다. 그 후 서병주 전도사를 임시로 초청하여 담임목사를 도와 시무하게 하였다.


  • 2016-03-08 09:25

    이규갑 목사가 이순신장군의 직게후손이라 진광수에게 말햇더니 야~ 그럼 나는 진시황제 후예다하더군요.
    무식한 놈하고 생각햇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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