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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중요 성구 16회(마 5:10-12)…의를 위하여 핍박을…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8-17 11:46
조회
1090
여덟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하였다.
[의를 위하여]의 [의](디카이오쉬네스, δικαοσύνης)는 도덕적 의나 종교적 의, 또는 구원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앞의 두 가지 의미의 의는 이방인들도 나름대로 추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세상적 표준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다.
[핍박을 받은 자]의 [핍박을 받은]은 데디오그메노이(δεδιωγμένοι)로서 본래는 ‘추구하다’, ‘뒤쫓다’ 등을 의미했는데, 여기서 ‘격렬하게 박해하다’, ‘각박하게 따라가면서 괴롭히다’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베드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벧전 3:14)라고 하였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의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님의 교훈의 기본 주제이다(W. W. Wessel, H. E. Luccock). 비록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이나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 사상은 양쪽에 풍부하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18),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사 52:7),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와 같은 진술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고찰은, 주님의 왕권이 현재적 실재(하나님은 지금 자기 권한을 행사하신다)와 미래의 소망(하나님은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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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통치하실 것인데, 그때에 그분은 자신의 통치를 거역한 모든 것을 진압하실 것이다) 둘 다임을 드러내 준다(W. W. Wessel).
현재(마 12:28, 눅 11:20, 17:21)와 미래(마 13:41-43, 20:21, 막 9:1, 47, 14:25, 눅 22:16, 18, 요 14:2, 18:36, 고전 15:50, 고후 5:1, 갈 5:21)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즉, 유대교 개념처럼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이었다(E. Schweizer). 하나님 나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 통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실제적 구현이 곧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과 생애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움직여져야 한다.}(막 1:15의 주석).
마태는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보충 설명을 하였다.
알렌(W. C. Allen)은 이 구절을 또 하나의 복으로 보아 아홉 가지 복을 주장하나, 전통적인 견해이자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여덟 번째 복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란 윤리적 의나 종교적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 즉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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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C. E. G. Swift, “Bruce, Metzger”(in W. W. Wessel), W. W. Wessel, W. Hendriksen, C. R. Erdman, D. W. Burdick, R. McL. Wilso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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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빌 2:15)에게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말로 모함을 당하고, 악한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겪으신 것이다(참조: 마 27:39-44, 막 15:15-20, 29-32, 요 8:48, 10:20). 베드로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은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2-13)라고 하였다. 베드로 역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라고 하였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고, 칭찬과 환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이다. 이런 망상을 버리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없다. 오히려 세상의 조롱과 핍박 등이야말로 구원받은 확실한 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으로 알아 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기뻐하고](카이레테, χαίρετε)의 명사는 카라(χαρά)이며, 세상적인 기쁨이나 값싼 승리나 값싼 성공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대체로 종교적 근거에 의한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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쁨을 뜻하는 것이다(시 30:11, 잠 29:6, 롬 15:13, 갈 5:22, 빌 1:4 등).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기쁨이요(롬 8:35-39),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요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살전 1:6). 참된 의미에서 인간 사회의 기쁨도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아갈리아스테(ἀγαλλιάσθε: 명사)이며, 그 “어근은 특히 하느님의 구속적 행위를 경험함으로써 일어나는 기쁨과 행복을 표시한다(시 51:12)”(R. Bultmann). 이 말은 ‘크게 기뻐하다’, ‘기뻐 날뛰다’라는 뜻도 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의 [하늘]은 천국을 뜻하는 것이고, [상](미스토스, μισθὸς)은 ‘보상’, ‘상급’을 의미한다.
하늘 나라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비례하는 것이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하였고, 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라고 하였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프로페타스, προφήτας: 1:22의 주석을 보라.)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당했다는 것이다(히 11장). 핍박을 통해 상급을 받았다는 해석(J. A. Bengel)은 틀린 것이라기보다는 마태의 심중에 있었던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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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 Bultmann, TDNT, Vol., I, pp. 19-21.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85-187.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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