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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러 가는 사람들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1-16 22:16
조회
1243
예레미야 13:15-23, 요한복음 11:1~16.
예수님의 일생은 번화한 예수살렘이나 도시를 자주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한적한 변두리나 농촌이나 외진 벽촌을 자주 찾아가셨습니다.
부패한 종교의 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의 광포, 유대인들의 무례함이 들끓는 곳보다는 복음전파와 개인적인 명상의 시간과 기도의 장소를 찾아서 조용하고 평화스러우며, 인정이 넘치는 외곽지와 시골이 주님의 마음에 들었든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베다니라고 하는 시골은 주님이 즐겨 찾으시는 곳이었습니다.
베다니에는 마리아와 마르다라고 하는 인정 많고 솜씨 좋은 자매가 있었고, 예수님이 친구와 같이 생각하던 나사로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① 눅 10:38~42,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 듣고 마르다는 음식 대접하는 일
② 요 11:1~46, 죽은 나사로의 부활
③ 마 26:6~13, 마리아의 기름부음

그러나 예수님이 이 외에도 자주 찾으신 것을 우리는 짐작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다니를 찾아 가시려고 할 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즐겨 찾으셨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실 의지를 보이시자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이 12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결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찬동하고 나서섰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은 죽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살기 위해 사는 길을 찾아 나아갑니다.
농민들은 농가부채와 농산물 저가에 견디지 못하여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고 기업가들은 자기들만 잘 살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과 임금을 착취하고 있으며 정권을 잡으면 큰 도둑이 되고 권력층에 있으면 서민을 무시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돌아보아도 외롭고 고독하고 서글픈 사람들이 농촌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에 메말라 있습니다. 너무도 속아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쳐 있습니다. 저 농산물 정책에 착취만 당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들어 있습니다. 영양실조와 온갖 오염과 노동에 시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큰 위로가 됩니다.
조금만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만 하면 그들은 곧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의 정신으로 사랑과 위로를 베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함께 죽을 각오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농촌에는 필요합니다.
그러면 “죽으러 가자”는 결심이 나오기까지에는 사회 사정이 어떠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농촌을 찾아 가려고 결심을 굳혔습니까?
그때의 농촌 형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어 있는 농촌을 찾은 것입니다.
빈곤한 농촌 출신의 나사로는 병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정권의 착취와 폭정에 시달리고 지친 육체는 종교의 지도자들의 오만함과 지역 관리들의 횡포에 더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지역 관리들은 로마 정부의 배경 속에서 지배층만 위했고 농촌 사람들에겐 위민정책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세였습니다.
교회들은 교회들대로 영적으로 고갈된 상태에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런 현실 속에서 병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어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육체의 병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런 병을 치료할 방법이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약이나 의술로 보다는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요구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금지한 부정한 자로 인정되는 문둥병자를 어루만지시던 사랑의 손, 소경의 눈을 어루만지던 사랑의 손, 벙어리의 혀끝을 만지시던 사랑의 손, 12년 혈루병든 환자의 더러운 손으로 움켜쥐었던 사랑의 옷깃이 어느 약보다도 치료의 효과가 큰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농촌의 뜻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무관심과 소외당하며 사는 계층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은 모두 외면하고 등지고 떠나가는데 희망의 예수님, 사랑의 예수님, 축복의 예수님은 오히려 농촌을 향하여 나아가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찾아 가시려는 것입니다.
그때 도마도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주님을 모시고 사람들이 외면하고 등지는 농촌을 향해 나아가려는 열정을 보입니다.
생명의 주님 창조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던 사랑의 눈, 심혼골수까지 살펴보셨던 영안의 눈길이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시던 희망의 음성이,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선언하시던 권능의 말씀이 함께 하시는데 염려가 없습니다.

어디에 무슨 병이 들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치료의 방법은 더욱 알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찾아오셔서 용기와 희망을 주셨든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느 약이나 의료기구 보다도 더 큰 치유의 효과가 큰 것입니다.

2. 무지와 잔혹함이 가득한 농촌을 찾은 것입니다.
유대의 땅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중앙에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찬양을 부르며,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특히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 빌라도의 거처하는 관저와 그에게 아첨하며 민족을 등진 간신배들로 우글거렸을 수도입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장로들과 결탁하여 이권에만 눈이 어두운 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자기들 세력확장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교만과 무례함과 방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금만 자기들의 눈에 거슬려도 돌로 치려했고, 죽이려했습니다.

눅 4:29,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밀뜨려 죽이려했습니다.
요 8:1~,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했습니다.
요 10:31,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였습니다.
행 7:58,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작은 농촌들의 모범을 보이고 덕을 세워야할 터인데 오히려 갖은 악행과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는 번화하고 번창하기도 하지만 살기와 증오가 가득하고 잔혹함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그와 반면에 농촌지역은 조용하면서도 그 나름대로 불신으로 가득한 곳인데 그런 곳으로 찾아가는 것도 대단한 결단을 갖지 않고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물론 망국의 원한과 제한된 자유 속에서 울분이 동족들에게 가혹한 행위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들에게 목숨 걸고 찾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야말로 감동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사야 2:4절에서처럼 “창을 변하여 낫이” 되게 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소외받는 농촌의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일이야 말로 새 생명의 활로가 아니겠습니까?

3. 죽음의 잠에 빠진 농촌을 찾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시 115:7)를 말합니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메말라버린 가운데 현실에 대한 관심은 거저 입에 풀칠하는 것 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잠이 들어있습니다.
발전하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와 개발에 뒤져있는 육지 속의 섬과 같은 이 지역은 참으로 잠든 농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가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 문화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 정신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에는 깨워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일도 역시 희생의 각오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을 각오한 고귀한 정신은 분명 병든 농촌을 치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실 것입니다.
살벌한 환경 속에서 돌로 치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빛으로 녹여주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농촌의 죽음 같은 잠도 깨워주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바쁘고 중요한 일과와 시간을 희생하시며 이곳까지 찾아오셔서 진료해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실 줄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도마는 소외된 농촌의 깊은 잠을 깨우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일가요?
하여간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려는 사명자는 참으로 숭고함이 엿보입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아마 도마의 죽기를 각오하는 도전 정신은 예수님께도 감동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생명걸고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어떤 방해물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과 동행하는 서도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데 그 어느 어느 누가 방해하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성도들도 도마와 같이 주님과 함께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밝혀주고 구원의 길로 이끌어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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