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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열어보게 하소서.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7-02-18 12:51
조회
2921
열왕기하 6:14-19, 로마서 8:31-39.


아프리카 탐험대들이 원주민들만 사는 곳을 들렸을 때 입니다.
원주민 어린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돌덩이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엄청나게 큰 다이아몬드들이였습니다.
탐험가들은 그 아이들에게 거울, 구슬, 머리 빗, 과자 등을 주고 그 다이아몬드와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무수한 다이아몬드를 채취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눈이 열리지 못한 사람들은 보아도 볼 줄을 모르고 만지고도 알지 못하며 먼저 보고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뺏기고 맙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다 해도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이었는데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못했던 광맥을 눈이 열린 사람은 발견하고 일확천금을 벌기도 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다 안 된다고 포기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실망하던 것들을 성공의 눈을 뜬 사람들은 보고 외에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단 하루도 우리는 눈감고 살지는 않습니다.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보고 사건들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눈뜨고 봐야할 것을 못 보기 때문에 지나쳐 버리고 실패하고 손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돌 뿌리에 걸립니까?
아래를 살피지 않아서입니다.
왜 이마를 부딪칩니까?
위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탄식하기도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능히 모든 사물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의 동편에 위치한 아람 왕은 늘 이스라엘 땅을 넘보고 정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많은 군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의 이 같은 작전은 언제나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람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오면 이스라엘이 먼저 알고 지키고 있다가 아람사람을 쳐부쉈던 것입니다.

아람 왕은 마음이 번뇌하고 고민했습니다.
신하 중에 누군가가 배신자가 있어서 이스라엘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의 신하 중에 내통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성에 선지자가 있어서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 모두 영음으로 듣고 미리 방비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엘리사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가 있다는 사마리아 도단성으로 밤에 군사들을 보내어 포위합니다.
엘리사의 시중드는 자가 아침 일찍 일어나 성벽에서 본 것은 아람 군사들이 성을 겹겹이 에워 싼 것입니다.
너무 놀라 간이 콩알만 해진 그는 허겁지겁 달려가 엘리사에게 그 같은 일을 고합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선지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하고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시중드는 자의 영안이 열려 본 것은 아람 군사들 보다 더 많은 불병거와 불말들이 사마리아 도단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언제나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 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 주십니다.
시중드는 자가 사마리아 도단성을 에워 싼 아람 군사들을 볼 수 있었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사들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눈은 땅의 것은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못보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우리는 왜 못 보는 것입니까?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눈앞에 어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알지 못하기에 단 몇 초 후에 일어날 일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① 피조물의 시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력은 한계가 있어서 세균이나 세포같이 작은 것도 못보고 우주와 같이 큰 것도 못 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것도 못보고 태양과 같이 밝은 것도 못 봅니다.
총알같이 빠른 것도 못보고 식물의 성장하는 것같이 느린 것도 못 봅니다.
하늘과 같이 멀리 있는 것도 못보고, 자신의 눈 섶과 같이 아주 가까운데 있는 것도 못 봅니다.
피조물의 시력은 한정된 물질의 세계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시력으로 하나님을 보겠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②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못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 믿음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시작하는 말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아람 군사들이 포위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는 믿음의 눈이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는 원수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주동한 종교의 지도자들은 영안이 어두워서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도 못하였습니다.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의심과 믿음은 융합하지 못합니다.
의심은 사탄이 가져다주고 믿음은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의심하는 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왕 바로가 특별 병거 6백승을 이끌고 추격해 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아 검푸른 파도를 출렁입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말씀에 의지한 채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위로 내어밀자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고속도로가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두려움과 염려로 출렁대던 파도는 이스라엘의 보호벽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8,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종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웠던 우물물을 다시 퍼 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을 때,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하여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 것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을 보였을 때 변하였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한 끼니의 양식이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께 드렸을 때, 5천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에 차고 넘쳤습니다.
이렇게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가질 때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충만하려면 세상의 것 땅의 것 유혹의 말에 속지 않아야합니다.
갈릴리바다에 풍랑이 이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께 “주여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나로 물위를 걷게 하옵소서.”라고 요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니 베드로는 주님만 바라보고 걸었을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만 바라보면 믿음이 자라게 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고 세상 것과 재리의 유혹을 바라보다가는 빠지기 쉽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일 때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주님이 함께 계심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니 더 많은 고난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③ 영력이 없어서 못 봅니다.
육신의 눈이 밝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의 작사가인 제인 크로스비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소경이었으나 눈을 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인 크로스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가를 6천곡이나 썼던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후일에 생명 그칠 때’ 등

죄를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외치다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종교 지도자들의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스데반 집사는 종교의 지도자들이 보지 못하는 하늘의 세계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안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선지자이면서도 칼을 든 천사가 자기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타고 있던 미물의 짐승 나귀는 그것을 보았고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담에 가까이 하였습니다.

2. 영안이 열려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성도가 몸에 병들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속에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고 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염려와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땅에 것에 얽매어 살던 삶이 변하여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고 영성이 새로워졌습니다.

사마리아 도단성의 주민들은 다시 한 번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사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성내에 있는 주민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서 기근과 공포에 쌓였던 것입니다.
막다른 절벽에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안의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아이를 삶아먹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밝은 사람들은 도단 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았을 때 마음에 평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으나 암몬 군사들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들이 천군 천사와 함께 도단 성을 지키고 있으니 이제는 안심되고 평안을 찾았습니다.
암몬 군사들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사들이 사마리아 도단 성을 지키고 있으니 자신이 생기고 용기가 솟았던 것입니다.
걱정 근심 불안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평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언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지만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불레셋과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불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은 모욕하고 이스라엘의 군사들을 조롱하지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모두 겁을 먹고 불안하여 떨기만 합니다.
그러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물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그의 칼을 빼어 목을 잘랐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불레셋의 골리앗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던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사기가 충천하여 함성을 지릅니다.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승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② 그러나 영 안이 밝아지면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몬 군사들을 보고 놀란 토끼같이 두려워 떨던 엘리사의 시중드는 자는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의 공포가 사라진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던 것을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도움을 요청하며 구걸하던 습관을 버렸습니다.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책망하며 방해하여도 그러면 그를수록 바디매오는 더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네가 무엇을 요구하느냐? 배불리 먹을 밥을 원하느냐? 네가 평안히 살집을 요구하느냐? 네가 추위를 막고 더위를 가릴 옷을 요구하느냐? 재물이 필요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소경 바디매오는
“내가 눈뜨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눈만 뜨면 먹을 양식도 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눈만 뜨면 돈을 벌어서 집도 장만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재물도 모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사람들에게 조롱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하는 대답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자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가 구걸하던 깡통도 버렸습니다.
그가 깔고 앉았던 거적도 버렸습니다.
그의 길을 안내하던 지팡이도 버렸습니다.
소경일 때 소유했던 물건들은 눈을 뜬 자에게는 모두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구걸하고 도움을 요청하던 옛 삶을 버렸습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버렸습니다.

③ 영안이 열리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확신 없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거하고 있던 믿음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농사를 지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물리쳤으나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두려움과 염려로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된 가인은 하나님께 “누가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 리이다”고 두려워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범죄 한 이후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타국으로 나아가 허랑 방탕하여 모두 탕진한 탕자는 광야에 나아가 돼지를 치면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하였으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이곳에서 주려 죽는 구나 내가 이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 하리라”하고 아버지 집을 찾아갑니다.
눈이 열리니 자신이 거하고 있는 위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눈이 열리니 자신이 행한 일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시대에 지식인들은 외국에 나아가 외국의 발달한 문물들을 바라보며 놀랍도록 발전된 현대문명의 선진국과 지금까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국의 모습에 개탄합니다.
그래서 조국의 개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 나라의 후진 국민성을 깨우치기 위해 교회들을 세우고 학교들을 세워서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덕분에 이 나라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 된지 100여년에 불과 하지만 많은 발전과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개화기에 많은 인재들이 교회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3. 눈이 열려 보게 됨으로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악한 천사들이 한 어두움의 주관자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하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선한 천사들은 무한하신 분의 권위아래 있습니다.
그의 성령이 감동시키고 그의 의지에 그들이 순종하고 그의 능력이 그들의 힘이 됩니다.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인 사탄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종입니다.
정신적인 찬탈자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는” 분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도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감각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삼라만상이 가득한 큰 산이 “불 말과 불 병거”로 가득하게 차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늘의 조력자들이 사마리아 도단성을 지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종 드는 자는 그것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성을 외워 싸고 있는 적군들만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사람은 아람 군대들의 번쩍거리고 덜거덕거리는 무기들 사이에서도 평온히 가득한 모습의 사람을 봅니다.
또 한 사람은 온통 당황하고 겁에 질린 사람을 봅니다.

왜 한 사람은 온통 겁에 질려 있는데 다른 사람은 희망과 영웅심에서 용기를 가질 수 있나요?
그것은 어떤 사람은 나쁜 면만 보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이며 물질적인 데만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좋은 면도 함께 보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안이 열려 보게 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은 무었입니까?

① 영안이 밝아진 사람은 기도의 응답이 빨라졌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갑절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야가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은 것같이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도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사가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에돔 군사들은 모두 눈이 어둡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은 원수들에게까지 관대하게 대하였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에돔의 군사들을 한사람 치듯이 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라고 말하자 엘리사는 그들을 치지 못하게 말립니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원수들을 칼로 쳐서 보복하는 것이 시원할 것이지만 오히려 원수들을 위하여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보복은 더 큰 보복을 낳고 자비와 사랑은 원수들을 더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② 영안이 밝아진 사람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육신의 눈이 밝은 사람은 육신 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린 사람은 육신의 일을 벗어나 더 크고 더 풍성한 관대함을 보입니다.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원수들이 주리고 고통당하면 고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육신의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조상 아브라함의 팠던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을 때 불레셋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들의 것이라고 우기자 양보하고 다른 곳에 우물을 팝니다.
그곳에서 물을 얻게 되자 불레셋 사람들은 또 그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은 다시 우물을 양보하고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이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채찍으로 치며 십자가에 못을 박고 조롱을 할 때 원수들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 집사는 성 밖으로 끌려 나아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들을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③ 영안이 밝아진 사람은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됩니다.
흔히 보는 일이지만 교통사고가 나 싸우는 사람들 중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실상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약합니다.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어항에 물이 줄어들면 고기들은 펄떡거리며 조급해 합니다.
그러다가 물을 넉넉하게 부어주면 고기들은 여유 있게 헤엄을 치고 유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안이 열려 밝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원수 아람 군사들을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게 하고 저희가 먹고 마시게 하여 되돌려 보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고 성경은 말합니다
. 그러자 아람 군사들은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얼마동안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넘겨보지 못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조급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영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두려움도 걱정도 염려도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고 구하여 영안이 열려지고 밝아진 가운데 은혜와 축복이 임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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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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