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 누가복음의 빈 무덤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4-03-27 11:22
조회
31
<누가복음 24:1-12>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8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1. 시작하는 말

주 예수님의 사랑을 구하는 교인들은 많지만, 주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바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잘 거두어 모신 사람들의 사랑과 충성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7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안치하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속이 텅 빈 것입니다.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역사가이자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의 빈 무덤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2. 주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중 하나인 빈 무덤

위험을 무릅쓰고,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바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충성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을 쫓아 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막달라인 마리아를 비롯해서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수산나와 살로메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여러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인 일요일은 나중에 주일이 되고, 기독교인의 성일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신이 된 예수님께 대한 여인들의 행동은, 지극히 아름답고 헌신적인 사랑과 충성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신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와 향품을 바르고, 곡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향품이나 향유를 바르는 것은 시신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가 발라진 것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는 여인들이 또 기름을 바르려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삼 일이나 지난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것도 팔레스틴의 기후로 생각하면 부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랑이란 때때로 현실적으로는 무모하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시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수 없게 되면, 무덤에라도 바르거나 뿌릴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무덤을 향해 가는 여인들에 대해 마가복음 16:3에,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굴로 된 무덤을 막은 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마가복음 16:4을 보면,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라고 했습니다. 염려가 기우가 된 것입니다. 염려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염려가 기우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에는,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설명했습니다.

천사가 돌을 옮겨 놓은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가실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며, 그 여인들과 베드로와 요한 등으로 하여금 무덤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452)는 마가복음 16:4의 주석에서, “부활을 지시해 주는 것으로서의 굴려진 돌은 죽음의 세력이 분쇄되었음을 시사한다.”라고 했습니다.

큰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본 여인들은 무덤 안에 들어가 보았지만, 주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벨하우젠(Wellhausen, 136)은 그렇게 많은 수의 여인들이 한꺼번에 무덤 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 표현은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섯 명 이상의 여인들이 굴로 된 무덤 속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두세 명씩 교대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무덤 속에 들어간 여인들의 눈에,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한 것처럼,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이나 교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못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그때 별안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곧 두 천사가 곁에 섰습니다. 마태는 “한 천사”, 마가는 “한 청년”, 요한은 “흰 옷 입은 두 천사”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사들의 차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각자가 겪은 시점이나 부분이 다르고, 천사들의 출현이나 부활은 상식적인 일이나 현상도 아니고, 자연적인 일이나 현상도 아니고, 합리적인 일이나 현상도 아니라, 초상식적이며 초자연적이며 초합리적인 일이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인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란 상태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경 기자들이 인위적으로 차이들을 없애고, 똑같게 조작했다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여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으므로 얼굴을 땅에 댔고, 두 천사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째서 무덤에서 찾는 불신앙을 드러내느냐는 책망입니다. 계속해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갔으나, 천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천상의 임무를 받고 알리러 온 것입니다.

여기서도 하늘과 땅의 차이와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8 이하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빈 무덤이 한 증거인 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최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우주의 섭리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보다 더 부활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예는 없습니다.

서구 문화의 이 대 주류인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에 정통한 세계적 지성인이요 유대교 지도자였던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받아 죽은 예수를 부활한 주라고 전파하는 교회를 혹세무민하는 이단이자 신성 모독 집단으로 여겨 핍박하고 잔해했습니다. 그 바울은 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에 가는 도상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변화됐습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된 바울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되 순교하기까지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바울 사도는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일시에 목격한 오백여 형제들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주 예수님의 부활은 성부의 역사인 동시에 주 예수님 자신의 권세로 스스로 부활한 것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이셨습니다.

여인들에게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라고 한 천사들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비로소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고했습니다. 마가복음 16:8에는,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라고 한 것을 보면, 무서움이 어느 정도 가신 다음에야 여인들이 그 모든 충격적인 일을 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여인들이 고하는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 역시 주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을 들었는데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여인들이 전한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았는데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보였으므로,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믿었다면, 기이히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시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육이신 것과 기적의 치유와 축귀 등의 사랑을 하신 것과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영적 사고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에는, 예수님이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26에는, 예수님이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당신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후반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죄 사함과 중생, 자유와 평화,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설교 동영상: 유튜브)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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