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교역자회 수련회 개회예배 설교(2008.9.1)
예수를 바라보라
히 13:6-8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전국여교역자회 수련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동안 이재희 회장님을 중심으로 전국여교역자회가 잘 정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이제 화해의 중심이요, 변화의 핵심으로서 우리 감리교회를 새롭게 하고, 부흥시키는데 주도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에 이대통령이 ‘거듭 난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언론과 타 종교로부터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거듭 난다’라는 말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듣기에 그렇게 이질적인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거듭남’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남’이란 단어는 한마디로 변화의 핵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마 변화를 강조하다보니 ‘거듭남’이란 표현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변화와 새로운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합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회개, 세례, 중생, 성장, 부흥 이란 낱말들은 모두 변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처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신 일이나, 마지막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대한 말씀은 전적으로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변화했습니까? 기독교만이 아닙니다. 요즘 세상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프로’이고, 또 하나는 ‘포로’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청소를 하면서도 어떤 아줌마는 “이 빌딩을 깨끗하게 만든다” 생각하고, 어떤 아줌마는 “더러운 쓰레기를 치운다” 하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줌마는 인생의 ‘프로’이고, 나중 아줌마는 인생의 ‘포로’입니다.
무엇을 하거나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이나, 하나부터 열까지 투덜대며 억지로 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포로’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또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안다는 것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알았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리와 행위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에베소서 4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배울 뿐 만 아니라 그를 닮아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의 길로 가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새사람으로 재창조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러기에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를 닮고, 본받기 위해 우리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7-8).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히브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증거 하는 편지입니다. 바로 유대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구분하지 못한 채 혼동하는 히브리인들을 향해 예수가 누구신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와 비교하고, 대제사장직을 비교하고, 옛 율법과 새 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려는 핵심은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태로 하여 태어났지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습적으로 믿는 예수에 대한 그릇된 상을 극복하고, 예수 바로 보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진실에 감춰진 우상파괴 작업으로써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과 진지한 대화 없이 사회를 향해 변죽만 울린 꼴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작은 성공과 함께 더 많은 실패를 불러왔습니다. 예수를 비판하다가 오히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입니까?
종종 언론에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독교에 접근합니다. 마치 황색 잡지 같은 방식으로 예수 특집을 다루는 꼴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두 번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를 바라보고, 그의 길을 따라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동행자이시며, 목적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길 없는 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불교계에서 유명한 경허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둔 어느 제자가 자기 스승을 본받아서 수행하는 모습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인용해 보겠습니다.
“경허는 낮이나 밤이나 그 어디에서나 심지어 꿈속에서도 내 마음을 지배하는 화두였다. 경허는 내가 먹는 밥, 꿈, 보는 사물, 입는 옷,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나는 한 순간도 경허를 잊어본 일이 없다. 나는 경허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눈을 빌려 보았고, 손을 빌려 만지고, 마음을 빌려 생각하였으며, 잠을 빌려 꿈을 꾸었다. 경허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울면 나도 울고… 경허가 길을 떠나면 나도 떠났다. 나는 경허의 그림자였고 경허 또한 나의 그림자였다.”
어느 가톨릭 신부가 이 내용에서 ‘경허’라는 이름 대신 ‘예수’로 바꾸어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단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습니다. “내게 이런 치열함이나, 적극적인 제자됨이 있던가? 예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던가? 늘 예수에 대해 말하고, 공부하고, 손가락으로 가르치지만 참되게 바라보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미국 주간지 <타임즈>가 밀레니엄 특집 기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예수를 손 꼽은 것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관계 속에서 분명한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그를 닮아 가는 일, 배우는 일, 믿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만, 우리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연회가 열릴 때마다 많은 새로운 목사들이 탄생합니다. 나는 선배 목사로서 그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 가지 형편에 처하더라도, 늘 낮은 자로 겸손히 처신하십시오. 늘 정정당당하고 신뢰를 주는 인물이 되십시오. 편법은 쉽고 매력적이지만 결코 편법이나 요령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요령에 급급한 사람은 평생 그런 목회만 한다는 것은 이미 선배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닮아 가는 일, 배우는 일, 그 분처럼 사는 일은 어렵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성으로는 어렵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가능합니다”고 말합니다.
돌아보면 목회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짐스럽습니다. 목사와 전도사라는 직책은 언제나 희생을 강요합니다. 사실 목회자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취보다 좌절을 더 많이 겪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가장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목사직은 그 사랑 때문에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순간도 예수를 잊어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예수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눈을 빌려 보았고, 손을 빌려 만지고, 마음을 빌려 생각하였으며, 잠을 빌려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예수가 울면 나도 울고… 예수가 길을 떠나면 나도 떠났습니다. 나는 예수의 그림자였고 예수 또한 나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모이신 모든 목회자들과 함께 하셔서, 늘 예수를 사랑하는 기쁨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위로와 새 힘을 얻으며, 희망과 비전을 성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