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원대 교수직원 연합경건회 설교(2008.5.20)
희망으로 달려가라
빌 3:12-16
하나님의 은혜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목원대학교를 방문하여 여러 교수님들과 직원 여러분과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특히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이요한 총장님과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목원대학교는 감리교회의 목회자 양성과 우리 사회의 인재를 양육하는 요람으로서 성장해 왔습니다. 이 대학의 성취와 보람은 바로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이었고, 그 열매와 결실은 오롯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길로 목원공동체를 매만지시면서 오늘까지 이끌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목원대학교가 크고 작은 소용돌이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 왔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요한 총장님을 중심으로 대학당국과 교수회의, 노동조합, 총학생회가 상호 이해와 양보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신뢰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이 만연해진 대학사회에서 빛나는 본을 보인 모범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목원대학교가 지향하는 밝은 비전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치하드립니다. 저는 목원대학교가 중부권의 명문사립대학 중의 하나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오늘의 목원대학교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세계와 인류를 향한 뜨거운 목마름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커다란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배들이 있었는데, 몸통을 드러낸 배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큰 배의 밑바닥 앞부분이 주둥이처럼 툭 튀어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이 부분을 용골이라고 불었습니다.
용골은 한마디로 풍랑을 만난 배가 기울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쇠뭉치였습니다. 즉 오똑이와 같이 중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배는 매우 역설적인 몸의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가려면 자기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거운 쇠뭉치를 달고 다니니 말입니다. 그러나 용골이야말로 꼭 필요한 배의 무게중심이었습니다. 저는 이 용골이야말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에게 있어서 ‘희망의 무게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원대학교 역시 커다란 배요, 수 만명의 학생과 교수와 직원과 동창이 공생하고 협동하는 항공모함과 같습니다. 이렇게 큰 배가 현실이라는 바다에서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망망대해에서 커다란 파도를 만나고, 풍랑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이 배에도 용골과 같은 ‘희망의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우뚱 거릴 때마다 중심을 바로 잡아주고, 넘어질 때 마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그런 용골은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중심이 되어주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경험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3:12).
그가 쓴 초대교회를 향한 편지들은 초기 기독교 뿐만 아니라 오늘까지 기독교 신앙의 무게중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해 평생 “희망으로, 한결같이, 부르심에 따라”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살아온 것이 논리의 전부입니다.
그의 성숙한 경험담은 지금도 인생의 달음질을 계속 하고 있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달음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자랑은 결코 빠름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다 이루었다고도, 자신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꾸준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음질 해왔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달음질에는 분명한 목표와 중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믿음과 또 목표를 가르쳐 주셨다는 믿음 그리고 언제나 함께 달리시며 내 삶의 중심이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빌립보서 3장은 13-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감옥은 희망을 말하기에 참 부적합한 곳입니다. 그곳은 앞길이 열려있는 희망의 장소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절망의 현장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달음질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는 홀로 달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동행이 되고, 길동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의지가 됩니까?
제가 김소진이란 소설가가 쓴 ‘마라토너’란 단편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한 노장 마라토너가 등장합니다. 그는 스스로 ‘페이스 메이커\\’라고 부릅니다. 한 마디로 중요한 선수 옆에서 함께 달려주는 ‘바람잡이’입니다.
이봉주 선수 같은 히어로 선수들이 잘 뛸 수 있도록 초반에 적절한 보조로 이끌어주기도 하고, 상대 외국선수를 견제해주기도 하고, 실은 완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그런 마라토너를 말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 나의 바람잡이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와 같이 함께 달려줄 그 사람이 있다면 내 인생의 달음질은 대단히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간 광야는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천천히 걸어가시는 하나님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한발자국씩 하나님을 따랐더니, 드디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행이나 길동무와 같은 아름다운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의식은 얼마나 도에 지나친지, 보통 사람들 조차 마치 경주하듯이 뛰어다니면서 살아갑니다. 사업도, 자녀교육도, 인간관계도 온통 경쟁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까?
매사에 기다리지 못하여 허겁지겁 서두르고, 과속이 선이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언론인 이규태 씨는 이러한 한국인의 과속 습관에 대해 ‘쿼터리즘’이란 말을 붙였습니다. 영어의 쿼터는 사분의 일을 뜻하므로 쉽게 ‘15분 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15분을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문을 읽어도, 식사를 할 때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도 15분을 넘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걸음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걸음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오늘과 내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예수의 본을 따라 예수의 발자취를 닮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는 기쁨이란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만 생긴다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 혼란과 고생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목원대학교야 말로 이 민족의 절망적인 시기에 희망의 씨앗으로 탄생한 대학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원대학교는 1953년 시작부터 세계감리교회의 협력 속에 탄생하였습니다. 찰스 스톡스 선교사님은 평생 한국선교사로 헌신하면서,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목원대학교를 설립하여 오늘 목원의 땅에 창조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원의 출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을 날줄로, 세계 교회의 협력을 씨줄로 하여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모태로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하는 시대의 자녀로 탄생한 것입니다. 이제 목원대학교는 희망의 결실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의 많은 선배 목회자 중에서 특히 이호운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이호운 목사님은 마치 “딸을 키우고 가꾸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목원대학교를 사랑하고 보살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목원에서 배출한 젊은 인재들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영적으로 피폐한 한반도에서 신앙의 젖줄이 되게 하였고, 민족의 심성을 가꾸고 꿈을 키우는 사상적 그늘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목원은 성장하였습니다. 예수 제자로서 가슴 뜨거움과 청빈의 삶이 오늘의 목원이라는 신화를 빚어 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랑으로 목원대학교가 끊임없이 겨레사랑과 인간사랑의 인격체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 감리교회에게 매우 특별한 명절입니다. 특히 올해는 존 웨슬리 회심 270주년 기념주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 주일에 전국 5,913개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 회심주일로 지켰습니다.
엊그제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느 언론사(한겨레 20주년)와 창간 기념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감리교회가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18세기 영국사회를 설명하면서, 당시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 서민 특히 노동자층이 절망하여 폭동이 일어날 지경에 이르렀으나 평화적으로 민주혁명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부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면서 평가하면서 그 중에서도 “우선 감리교가 서민층에 들어가서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고 가장 높이 추겨 세웠습니다. 참 놀라운 식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존 웨슬리가 우리 감리교회 창시자요, 그래서 집안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자화자찬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만큼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였고,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곧 사회개혁운동이었기에 영국은 프랑스 같은 유혈혁명을 사전에 막았다”고 높이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목원대학교가 존 웨슬리의 유산을 이어받기를 바랍니다. 그가 영국 옥스퍼드 캠퍼스 안에서 신성 클럽을 통해 영국 사회를 변화 시키고, 현재 전 세계 7,600만 명의 메도디스트의 신앙적 모범이 된 것처럼, 목원대학교 안에서 크고 작은 실천을 통해 위대한 전통을 잘 계승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희망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달음질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달려 우리 앞의 길을 마련한 존 웨슬리 역시 우리와 함께 뛰는 페이스 메이커가 될 것입니다. 일찍이 도익서 선교사님과 이호운 목사님과 같은 웨슬리안들이 이 길을 달려 갔습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 희망의 달음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목원대학교가 지역사회의 자랑과 우리 민족의 기대와 동행하면서 어엿한 걸음으로 성장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와 사명을 명심하여 그 뜻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목원대학교가 자랑하는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을 반석 위에 굳게 지켜나가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이 되어주길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주는 목원대학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