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기독교연합회 부활절연합예배 설교(2008.3.23)
빈 무덤, 영원한 희망
눅 24:1-6
할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인천지역 기독교연합회 연합회 주최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한국교회는 124년 전 부활주일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본국으로 보낸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에 도착한 직후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여러분은 한국 기독교의 첫 출발점인 인천시민으로서 참된 부활의 증인,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부활절은 기독교 달력에서 가장 오래된 절기입니다. 부활절을 맞기까지 지난 사순절 기간은 부활절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고난과 고통을 깊이 체험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진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일회적 사건이었으나, 부활의 의미는 결코 일회성 행사에 그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가 고난과 시련을 딛고 부활신앙의 터 위에 굳게 세워진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신앙으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확신이 없는 믿음은 흔들리는 그릇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 안의 것까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고, 하나의 속임수와 같이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믿음에 있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은 단지 겉모습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솝 우화에 ‘요술쟁이와 생쥐’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 고양이가 살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측은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의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개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개의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 주었더니,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망한 요술쟁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양만 바꾸어졌지 마음은 계속 생쥐의 마음이니 넌 가망이 없다. 다시 생쥐가 되어라.”
믿음은 속사람의 변화를 뜻합니다. 겉모양이야 어떻게 보이든, 외형적인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것들은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해결은 생쥐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거듭 나는 부활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절은 다른 종교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하고 신비한 날입니다. 사실 죽음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불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을 믿고 축하하는 신앙은 기독교 외에서는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부활 소식의 첫 전달자는 바로 여성이었습니다. 역시 여성은 위대합니다. 요한복음은 이 여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빈 무덤 때문에 근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은 누군가 시신을 훼손하여 예수님을 두 번 모독한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군병을 많은 돈으로 매수하여, 제자들이 도둑질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거짓 증거로 악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죽음을 이긴 자리였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산 증거였습니다.
빈 무덤은 믿음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빈 무덤은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희망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성경 주석책인 미드라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묘지를 동네 밖에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묘지가 나타나면 곧 동네가 가까이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으로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사막은 뜨겁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마침내 물도 떨어졌습니다. 아들은 목이 타고 피곤해 죽을 것 같다고 원망하며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동네가 나타날 것이라며, 아들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얼마쯤 가자 묘지가 나타났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안도하면서 이제 묘지를 보았으니 곧 동네가 나올 것이라고 아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덤이 절망이나 끝을 상징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과 희망으로 인식된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실패나 좌절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죽어야만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빈 무덤은 제대로 죽음으로써만 제대로 살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무덤조차도 남의 것을 빌릴 수밖에 없던 예수님의 삶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부활에만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웅변합니다. 그것은 덧없는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저승 백년보다 이승 일년이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부정한 것이고, 매우 가까이 존재하는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또 죽음은 이승의 좋은 것을 빼앗아 가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죠르드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엄청난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심하고 고통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통을 피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우리를 안심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세계의 십자가> 전시회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많은 십자가 중에서 십자가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 십자가가 있어서 참 궁금하였습니다. 이날 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한 가운데 뚫린 구멍은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유명한 상징으로, 바로 빈 무덤을 상징하는 부활 십자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한 가운데 뚫린 구멍은 빈 무덤, 즉 십자가를 넘어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예부터 십자가 가운데 보석을 장식하는 것도 주요한 전통인데, 보석 장식도 빈 무덤을 표현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전통은 빈 무덤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이를 통해 부활의 진실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 신앙을 의미합니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원한 희망을 의미합니다.
희망은 깨어있는 자의 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라고 쉼 없이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은 바로 지금 내 안에서 이루어질 사건이어야 합니다.
예수 부활을 증거한 두 천사는 여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라고 전하였습니다. 즉 부활하신 주님은 여자들을 향해, 또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 우리들을 향해 다시 갈릴리를 상기 시키셨습니다.
갈릴리는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갈릴리는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베드로를 만나신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날 밤,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그날 새벽,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만남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게 한 위대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 거룩한 물음 앞에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 거룩한 물음 앞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 거룩한 물음 앞에 순종하는 것임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베드로를 변화시킨 핵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위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위기가 찾아 왔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거룩한 물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위대한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거룩한 물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거룩한 물음에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물음이 나를 일으켜 주고, 길을 돌아가게 하고, 새로운 삶을 다시 결단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에 방황하고, 인생이 고달파 넘어지고 좌절할 때,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이 생겨 유혹에 빠져 주님을 멀리할 때, 그럴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떠한 비난과 책망보다 먼저 거룩한 질문을 하심을 믿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이 나를 살리고, 그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를 살릴 것입니다. 이 물음이 바른 순종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한 종류의 인생은 이미 죽고, 다른 종류의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 변화는 윤리적인 변화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빈 무덤에 있었다면, 우리 자신의 빈 지갑이라고 결코 행복이 구멍난 것은 아닙니다. 부활신앙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고난이나, 십자가도 그 너머 부활이 있음을 굳게 믿고 말씀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참 증인이 되는 길, 거기에 영원한 희망이 있음을 믿는 참된 신앙인의 길이 있습니다.
이 시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 부활하신 주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