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폴대학교 채플 설교(2008.3.5)
고난을 찬양하라
이사야 53:4-6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세인트폴신학대학교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로 준비하는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로부터 사순절 여섯 주일마다 고유한 이름이 따로 있었습니다.
첫 주간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즉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 91:5)이고, 둘째 주간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 25:6)이며, 셋째 주간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 25:15)입니다.
그리고 현재 네째 주간은 라에타레’(Laetare)인데 그 주제는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사 66:10)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사순절의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마치 한 주간에 한 송이씩 부활의 꽃인 일곱송이 수선화를 피우는 과정처럼 느낍니다.
저는 이번에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가 주최하는 \\’크리스찬 피스메이킹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지난 2006년 서울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의 사전 행사로 한반도 평화 포럼이 열렸는데, 그 때 북일리노이연회에서도 여러분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번 행사는 그 주제와 규모가 한반도의 평화문제 뿐만 아니라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화해와 평화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이 사순절 네째 주간에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이사야 66장 10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성지로 이해하는 팔레스타인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합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보기를 들어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돌을 던지는 한사람으로 자기 얼굴을 넣었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를 못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 패거리의 한사람으로 자기 얼굴을 표현하였으며, 또 돌아온 탕자의 모습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의 심정으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도 죄인으로서 렘브란트와 함께 그 악역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찬양인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는 \\’임마누엘\\’부터 \\’고난 받는 종\\’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처음과 끝까지 노래한 예언자입니다.
사실 성탄절기 찬송인 크리스마스 캐롤도 좋지만, 고난절기 찬송은 더욱 깊은 의미가 느껴집니다. 사실 신앙은 기쁨과 자랑보다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 더욱 성숙해 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기쁨과 축하의 노래보다 상처와 슬픔의 노래가 더 무게 있고 진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 시리즈의 네 번 째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 종의 정체가 ‘누구냐’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종에 대하여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느냐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에는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짊어졌다’,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였다’ 처럼 ‘그’라는 3인칭 단수와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수 없이 비교하여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난받는 종이 겪은 멸시, 간고, 질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 따위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받은 벌이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질고는 하나님에게 맞으며 버림받은 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존재여서 멸시를 당하고 쫓겨나게 마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은 것으로 드러난 죄인하고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그’가 당한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의 죄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런데 그가 남의 죄들까지 짊어지고 가서 없애버린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함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할 것이라는 발언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유일한 진술일 것입니다. 그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속죄양으로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이렇듯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개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가 겪는 고통은 매우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입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종이 받는 고난을 통해 ‘우리’와 ‘공동체’가 치유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달리기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과 노예들에 대한 처형법이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사형방법인 십자가형이엇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19)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의 증인이 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처럼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요, 마틴 루터의 주장처럼 “십자가 없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눈으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많은 세상에 살기에 십자가 속에서 만사형통의 신비를 찾고자 했습니다. 아픔이나 대속의 신비는 사라진 채 때로는 십자가가 값싼 부적으로 취급받기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인 2세기 무렵 십자가의 효험에 대한 소문이 커졌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 수집되고, 매매되었든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우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매달리셨다고 주장하는 십자가를 다 모으면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시대, 십자가를 외면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욱 더 고난을 찬양하고, 또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고난을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십자가의 한 귀퉁이를 붙잡고 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참되게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렘브란트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야 합니다. 바로 그의 고난이 나와 관계가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이며, 고난 받는 종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의 증인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바로 고난과 영광이란 모순과 역설이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얻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려고 세인트 폴 선지학교에 모인 여러분, 고난을 찬양하는 그 역설을 이 학교에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 모순을 이 동산에서 몸으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순과 역설 속에서 신비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세상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나가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