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교회전국연합회 동계수련회 개회예배 설교(2008.1.24)
희망의 원칙
딤후 3:14-17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제29회 전국평신도지도자 동계수련회와 같이 하시길 축원합니다.
2008년 새해에 한 해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동계수련회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참 만족과 참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사실 새해가 왔다고 저절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은 그 자체로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다만 새해를 맞아 새롭게 결단하고, 새해를 맞아 또 다시 다짐하고, 새해를 맞아 뜨겁게 기도함으로써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동계수련회 주제인 “변화, 성숙, 나눔, 복음의 빚을 갚자!”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그 열매를 거두실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존 웨슬리 회심 270주년의 해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영적각성의 결과로 생겨난 회심의 종교요, 부흥운동으로 시작한 능력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지난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70주년이라는 시간과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서 제2의 회심, 제3의 부흥을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는 1789년 감리교 설교자 총회에서 감리교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리교인을 불러일으키신 목적은 어떤 새로운 교파를 세움이 아니요 먼저 교회를 개혁하고, 민족을 개혁하고,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예수 복음으로 새로워져야 하고, 웨슬리의 헌신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 온 침례교 목사 스카렛 브레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리교인은 형식적인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단순한 규칙쟁이가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방법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런 기대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는 우리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들부터 이런 위대한 신앙인 존 웨슬리의 믿음과 삶을 닮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위대한 인물은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산업혁명이 진행된 18세기의 영국은 매우 혼란스런 사회였습니다. 과거로 붙잡아 두려는 봉건적 질서는 당연히 미래로 나아가려는 근대적 질서와 대립하였고, 비약적인 생산력의 향상은 더 많은 빈민을 거리로 내몰았으며, 심지어 어린이에게도 18시간의 노동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영국사회는 온통 사회가 갈등, 대립, 분열 속에서 있었는데, 이러한 때 기독교인들의 삶을 조직적으로 일구어 인간의 구원과 사회의 개혁을 동시에 모색한 신앙공동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존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은 새 부대에”를 실천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270년 전인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회심 이후 낡은 껍데기인 성공회를 뛰쳐나와 영국사회를 신앙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새 부대를 깁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성공회 사제에서 거리의 전도자로 자신을 출애굽하였고, 옥외설교를 금지하는 법을 어기고 광산에서, 광장에서, 장터에서 가난한 심령들을 향해 성령의 불을 질렀습니다.
존 웨슬리는 어려서 불속에서 건져냈다고 하여 ‘타다만 불쏘시개’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결국 용광로가 꺼져 버린 듯한 영국 사회에 새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곧 사회개혁운동이었기에 영국은 프랑스 같은 유혈혁명을 사전에 막았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감리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리교 정신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나는 감리교회가 능력 없는 형식적 종교만 남게 될 것을 염려한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벽두에 우리 감리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회심운동, 새로운 부흥운동을 주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존 웨슬리라는 훌륭한 신학이 있습니다. 훌륭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훌륭한 전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웨슬리 영성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교파의 특성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은 침례교인을 배우라.
교회충성은 루터교인을 배우라.
교인의 긍지는 성공회를 배우라.
단순한 믿음은 퀘이커교도를 배우라.
종교를 높이는 태도는 유대교를 배우라.
기도생활은 장로교인을 배우라.
봉사생활은 구세군을 배우라.
교회를 널리 들어냄은 천주교를 배우라.
기쁨에 찬 신앙은 흑인들을 배우라.”
그러면 감리교인들에게는 무엇을 배워야한다고 해야 적당할까요?
“진실한 생활은 감리교인을 배우라”입니다.
저는 이 한마디에 우리 감리교회의 본질이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믿을 신(信)과 열매 실(實), 즉 신실은 존 웨슬리의 ‘의인과 성화’의 신학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해 영적대각성의 100주년을 보내면서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성숙과 부흥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특히 감리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신실한 사람들(Faithful Members)’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마디로 ‘신실한 사람’은 ‘믿음(信)과 삶(實)’이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로 감리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실한 사람들”로 거듭나고 영적인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민족과 사회를 향해 강력한 희망을 제시해 나가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3장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으로,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는 데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 시키고, 사회를 개혁하는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사람들에게 두루 공감을 주는 것은 그의 일관된 삶과 행동 때문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사랑의 율법, 사랑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원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뼈대이고, 기본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거룩함이요, 경건한 삶의 태도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세속주의, 물질주의, 기복주의, 분열주의 같은 암병들이 온통 우리 교회를 망치고, 목회자들을 병들게 하고, 교인들을 황폐화 시키고 있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최소한의 배운 사람 노릇을 안 한다면 우리 사회는 위기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최소한의 신앙인으로서 모범이 되지 못하다면 교회의 위기가 닥쳐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은 그들의 행실이 사랑의 원칙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율법학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규칙과 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지 않았습니까?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심지어 제게도 청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총리는 물론 장관과 수 천 명에 이르는 임명직을 위해 인재풀이 총 가동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은 내편, 내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다 쓰기 어렵다고 합니다. 인사청문회가 얼마나 어렵든지, 이젠 “누군들 그만한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공직자에 대한 국민들의 자격기준도 높아졌습니다. 학력위조는 물론 재산형성 과정이나, 심지어 교통법규 위반까지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대단한 정직성을 보는 인격심사도 아닌데 그것조차도 바늘구멍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정직, 신의, 공사구분, 원리원칙… 이런 일에 대단히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실력은 적임자인데, 인격적인 면에서 미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공적인 자리에서 평가를 받게 될 때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투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하나님의 심판은 둘째 치고, 적어도 인사청문회에서라도 자신 있게 통과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존 웨슬리의 영성과 신앙원칙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재를 키운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일꾼은 모두 우리 감리교회에서 배출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감리교인은 그런 믿음의 사람, 신뢰의 사람, 실력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존 웨슬리는 위대한 개혁자였습니다.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원칙, 희망의 원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구호는 바로 ‘신앙의 원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신앙의 원칙이란, 첫째 오직 신앙으로만(Sola Fide), 둘째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 셋째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더러 원칙을 지키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우고,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할 원칙은 둘째 치고라도, 내 자존심보다 더 소중히 지켜내야 할 신앙의 확신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교회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떤 권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의 증언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말씀은 우리를 분명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생기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할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왜 오늘 우리 교회가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까? 한 마디로 오늘 우리 교회가,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예수!”, 입으로만 “주여!”를 외칠 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지만, 내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가장자리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지만 청지기의 노릇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독회장이 되면서부터 ‘희망의 전도사’ 노릇을 자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교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와야만 교회가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는 일, 이것은 변함없는 희망의 원칙입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책에는 베두인 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노인이 천막 근처에서 칠면조를 키웠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칠면조를 훔쳐갔습니다. 노인은 아들들을 불러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은 “칠면조 한 마리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무시했습니다. 몇 주 뒤에는 낙타를 도둑맞았습니다. 아들들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몇 주 뒤 이번에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이번에도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몇 주 뒤 노인의 딸이 강간당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칠면조 때문이다. 놈들이 칠면조를 빼앗아 가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두윈의 칠면조와 같이 우리 신앙에도 기본과 원칙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마음, 기도의 정신, 기도의 핵심을 잃으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크게 타락한 것은 바로 소중한 희망의 원칙을 잃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지닌 메토디스트답게 사명감을 갖고 복음 앞에 더욱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희망의 원칙으로 감리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회복시켜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감리교회를 새롭게 하는 출발점이요, 감리교회 부흥을 모색하는 위대한 도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제29회 전국평신도지도자 동계수련회가 주님께서 제자를 뽑으시고, 훈련하셨듯이 예수의 복음으로 훈련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200년 새로운 비전을 품고 2008년 새로운 삶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파송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