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종강예배 설교(2007.11.27)
어둠과 빛의 갈림길에서
요한1서 1:5-10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먼저 종강을 맞이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한 학기동안 공부하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또 신학생들을 참되게, 지혜롭게 양육하신 총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예전부터 우리는 이곳을 선지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언자 학교인 감신은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한마디 말이 바로 ‘감신성’이란 개념입니다.
감신성(監神性)이란, ‘신학 하는 길’에 있어서 남다른 특별함이었습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고고함이고, 영성과 역사의식이 겸비된 깨어있음이며, 한국 신학교육 가운데 최고라는 (약간은 교만한) 자부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감신학생은 시야와 안목이 넓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도 꿈이 많았습니다. 사회적인 문제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도 교회에서 반듯하게 지도자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이러한 ‘감신성’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진리의 사람으로서 그 등불을 전하는 일을 최고의 사명과 자부심으로 믿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리교 성직자가 되는 훈련과정에 최선을 다해 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마지막주일을 보내고, 강림절 첫 주를 기다리는 특별한 의미의 시간입니다. 즉 교회력으로 보면 한 해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끄트머리’라는 말은 한 해를 마감하는 끝이면서 동시에 한 해를 출발하는 시작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 우리말입니다. 종강도 마찬가지여서, 한 학기의 마무리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학기를 예비하는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두 요한이 일 년을 나눈다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요한이란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12월 동지(冬至)의 성인이고, 세례 요한은 6월 하지(夏至)의 성인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한 것처럼, 빛이 점점 쇠하는 하지는 세례 요한의 날입니다. 사람들은 빛의 갈림길에서 분명한 시대의 징조를 파악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 속에 두 요한이 존재함을 믿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 목사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가장 깊은 어둠의 때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어둠과 빛의 갈림길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혐의를 받고 악명 높은 나치 감옥에 투옥된 1943년 말경,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던 절기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묵상을 하던 중에 이런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독방생활은 강림절에 관한 많은 것을 나에게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희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는 현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는 본회퍼 목사님의 실토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로 강림절은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언자 하박국처럼 파수군의 역할을 자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예언자요, 미래를 바라보는 선지자였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더딜지라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때가 되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다림이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곳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강림절에 영적으로 각성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본문인 요한일서 1장 5절은 빛과 어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본문을 요약하면, 빛은 첫째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둘째 진리에 속한 것이며, 셋째 믿는 이들 간의 사귐과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둠은 첫째 죄에 속한 것이고, 둘째 불의를 행하는 일이며, 셋째 서로 등을 돌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당시 어둠의 세력의 대표자인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믿는 이들 간의 사귐과 사랑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죄를 지을 수 없는 신적인 빛의 알맹이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속에서 바라볼 때 죄인으로 드러나는 존재요, 그 죄를 시인하고 회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빛과 어둠의 갈림길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빛과 어둠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진리와 거짓을 문자적으로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빛 가운데 있는지, 누가 어둠 가운데 있는지는 실천적인 태도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 된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세상의 빛”(요 8:12) 이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요, 진리 안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며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빛은 어둠과 대비되어 더 실감나는 법입니다. 특히 빛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장님의 경우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점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빛과 어둠, 진리와 죄에 대한 논쟁이 붙었고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라면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비록 눈은 떴으나 하나님과 친교하지 않고 이웃 간에 사귐이 없다면 어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등을 돌린 죄 된 삶이요, ‘장님 의식’으로 가득한 삶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 빛을 보게 된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눈이 먼 거지의 눈에 흙에다 침을 개어 바르고,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곧 눈이 밝아져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신비하기 보다는, 오히려 매우 구체적입니다. 손으로 만지듯 사랑의 실천이 따듯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빛으로 오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손으로 만지듯이 고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의 장님의식을 벗기 위해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미명이 새벽인지 어둠인지 그 정체를 혼돈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둠의 종, 죄의 종에서 벗어나 진리에 속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은 “나와 같이 깨어 있으라”(마 26:40)고 당부하셨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작가는 신이 숨어버린 시대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는 이 소설 말미에서 예수님의 기적 사건인 ‘거라사의 광인’ 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악령이란 당시 무신론적 러시아인들, 즉 불신앙적 사고방식과 숨은 신에 대해 조롱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뜻이 가리워진 삶 속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악령이 전전하고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에 속할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등불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고백할 뿐 아니라 나 자신 세상의 빛임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필리핀 마르코스 독재 하에서 저항운동을 벌였던 남프렐(Namprel)의 구호는 “어둠을 탓하지 말고 한자루 촛불을 켜라”였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회개를 모를 만큼 교만하거나, 어둠에 사로잡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서 기자는 11장 7절에서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란 소설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 우리 세대는 젊은 시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바로 영혼을 일깨우는 경험이었습니다. 주인공 조르바는 새벽마다 먼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날마다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새벽마다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날마다 창조의 새벽의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깨달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과 낯을 교차하여 살게 하심으로써 빛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침에 동이 트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 것처럼 우리들 신앙인들의 삶을 빛으로 무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삶은 매우 구체적인 빛의 삶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살전 5:6). 스스로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주의 강림의 날이 바로 축복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 없이, 영적인 근신 없이 막연한 평안과 안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기가 닥칠 것이 분명합니다.
강림절은 우리에게 자든지 깨든지 주님의 약속과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각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각성은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든지 깨든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등불을 준비한 다섯 처녀들처럼 이날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성을 다하는, 또 한국감리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보다 평화롭게 하기 위한 기도와 지혜와 말씀의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희망의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는 말씀이 여러분을 통해 분명하게 구체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는 강림절은 어둠이 가장 깊은 때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가장 깊은 동지가 지난 직후 성탄의 빛이 임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교훈입니까? 바로 강림절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여명의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둠과 빛의 갈림길인 강림절기에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과 진리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