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폐회식 설교(2007.8.31)
오직 하나님께로
마 6:12-13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국교회 모든 교단이 연합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대부흥 100주년 기념행사를 잘 마치고 오늘 폐회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앞장서 수고하신 교단장님들과 교단 총무님들, 또 사무국 관계자들, 그리고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교회적으로 배려하고 참여해 주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먼 미래의 한국 크리스찬들에게 보내는 타임캡슐을 묻고 돌아왔습니다. 기념비는 지난 과거의 100년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타임캡슐은 앞으로 100년을 향한 우리 공동의 약속입니다.
기념비가 100년을 돌아보는 이정표가 되었다면, 타임캡슐은 100년을 내다보는 좌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국교회 현대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을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올해 2007년은 한국기독교가 연합하고 협력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대부흥 200주년을 맞이할 씨앗을 뿌렸다고 믿습니다.
고무적인 것은 KNCC와 한기총이 올해처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한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활절연합새벽예배와 대부흥 100주년 기념사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의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젠 서로 눈이 맞아서 성탄절 축하예배도 함께 하자고 할까 부담스럽습니다.
몇 해 전부터 한기총과 KNCC, 양대 조직 간 일치운동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동안 지지부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뢰와 상호이해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하나 되고, 연합하는 방향으로 점차 발전해 나아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무엇보다 현안이 되고 있는 한국찬송가공회의 난맥상과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로 야기된 해외선교의 문제를 공동과제로 삼아 함께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당장 두 가지 현안이 과연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하여 그 잘못된 행실을 고치고 있는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단장협의회는 ‘21세기 찬송가’ 발행과 함께 불거진 문제로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가졌습니다. 교단장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하면서 과연 우리 자신이 문제를 풀어나갈 능력이 있는가 하는 회의가 생겼습니다. 제 눈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거룩한 책인 찬송가조차 경제논리로만 풀려고 하고, 이익관계에 좌우되어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사업에도 자정능력을 상실하면서 어떻게 기복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참된 회개와 부흥을 가능케 할 수 있겠습니까? 온 교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사로 잡혀있으면서 어떻게 천만 성도를 향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극적으로 실마리가 풀린 아프가니스탄 피랍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국민여론과 언론의 부정적인 반응을 들으면서 참으로 서글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매를 맞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시시비비 이전에, 선교행위냐 봉사활동이냐를 구분 짓기 이전에, 샘물교회 청년들의 부주의와 경솔함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 모두의 문제요,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신앙고백과 선교에 대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우리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앞에 충성해야 합니다. 고난과 순교를 무릎 쓰면서 희생했던 선배 신앙인들의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난 받는 것은 복음에 충성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욕을 먹는 것은 고통당하는 세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마치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단 간에 선교정책 협력과 공유는커녕 경쟁심과 공명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 간 경험의 나눔과 배려는커녕 선교사업을 하면서 기득권과 독점의식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온유함을 잃어버린 채 선교라는 이름으로 땅을 차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의 화평케 하는 능력을 외면한 채 하나님의 아들됨만 주장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결과 십자군전쟁 식 공격적 선교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고, 물질을 앞세워 복음을 상업화한다는 빈정거림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물론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 일지라도, 기독교를 불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풀려진 루머일지라도 우리는 이것조차도 나 자신의 행위로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각성운동에 임하는 기본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때마다 반복하여 드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2-13).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겸손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해주옵소서.
우리가 행한 죄 때문에, 우리가 빠진 유혹과 욕망 때문에, 우리가 겪은 악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기에 우리는 다시 주기도문부터 겸손히 간구할 수 있는 마음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전에 사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기도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 주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 안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요, 기도 중의 기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일상적으로 잘못된 습관을 반복하고, 관행이란 이유로 잘못된 범죄를 되풀이 한다면 우리는 해마다 회개를 위한 기도를 되풀이 하고, 영적각성을 위한 행사를 반복해야 할 지 모릅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책에는 베두인 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노인이 천막 근처에서 칠면조를 키웠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칠면조를 훔쳐갔습니다. 노인은 아들들을 불러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은 “칠면조 한 마리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무시했습니다. 몇 주 뒤에는 낙타를 도둑맞았습니다. 아들들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몇 주 뒤 이번에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이번에도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몇 주 뒤 노인의 딸이 강간당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칠면조 때문이다. 놈들이 칠면조를 빼앗아 가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바로 베두윈의 칠면조와 같이 우리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 기도의 마음, 기도의 정신, 기도의 핵심을 잃으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크게 타락한 것은 바로 소중한 작은 기도를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대부흥 100주년은 우리에게 일회적 행사일 수 없습니다. 상암동에 모인 10만 기독교인들의 성회가 국민을 상대로 벌인 회개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저는 대부흥 100주년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신앙생활의 기본을 회복하는 내면으로부터의 전환점이요, 역사적인 반환점이 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폐회예배가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한국교회가 영적각성운동의 열매를 맺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