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교회 주일예배 설교(2007.8.19)
희망의 달음질
빌 3:12-16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왜관교회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왜관교회를 방문하여 이성우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을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께서 앞으로 더욱 아름답고, 더욱 은혜로운 꿈과 비전을 왜관교회 위에 허락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올해 1월부터 희망대심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왜관교회 방문은 희망대심방 아홉번째 순서입니다. 저는 전국 방방곡곡을 심방하면서 영남선교대회의 붐을 일으키고, 감독회장으로서 어려운 지역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그동안 소외된 지역의 감리교인들에게 희망을 나누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멀리 전라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목회 오지와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녔는데, 지지난 달에는 울릉도와 독도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 영남선교대회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산 입구인 왜관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왜관교회에서 영남선교대회를 앞두고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마치 결전의 날을 앞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지난주 월요일 아침 10시에 인천 100주년 기념탑에서 출발한 희망달리기팀이 이 자리에 도착해 함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수고가 참으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123년 전,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인천 제물포부터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까지 무려 755킬로 미터를 달리는 희망달리기는 감리교 영남선교대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여기 왜관교회까지 달려왔습니다. 이 희망달리기는 우리 감리교회 유일한 무교회 시군지역인 군위군에 교회를 개척하려는 목적을 갖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듣자니 이번에 40여명의 참가자들 중에서 절반은 노익장을 자랑하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왜달리냐고 하니까, 영적대각성 100주년을 맞아 뭔가 몸부림을 치긴 쳐야겠는데, 입으로만 할 수 없고 그래서 뛴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회개하고, 입술로만 부르짖었지 내 안의 참된 성화에 대해서는 소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각성의 대장정을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 웨슬리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평생동안 계속하는 희망의 달리기라고 믿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평생 ‘희망의 달음질’을 했던 자기 경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3:12).
그는 평생 “희망으로, 한결같이, 부르심에 따라” 복음 증거자로 달음질해 온 사람입니다. 그의 성숙한 경험담은 지금 인생의 달음질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달음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자랑은 결코 빠름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다 이루었다고, 자신이 완전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꾸준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음질 해왔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달음질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다는 믿음과 또 목표를 가르쳐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감옥은 희망을 말하기에 참 부적합한 곳입니다. 그곳은 앞길이 열려있는 희망의 장소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절망의 현장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달음질 하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사람들마다 마치 경주하듯 뛰어다니면서 살아갑니다. 사업도, 자녀교육도, 인간관계도 온통 경쟁관계입니다. 이러한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까? 특히 매사에 기다리지 못하여 허겁지겁 서두르고, “빨리빨리”가 입에 배어있는 사람이 우리 한국인입니다. 과속이 선이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달음질은 다릅니다. 한마디로 그의 달음질은 ‘희망의 달음질’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달음질은 희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희망이란 오늘과 내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기쁨이란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만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 혼란과 고생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어느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던 군의관이 중상을 입고 운반되어 온 사병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군의관은 바쁘게 지나치면서 이 환자를 잠깐 들여다보더니, 무심코 이렇게 말을 던졌습니다.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만 버티면 희망이 있겠군”.
중태에 빠진 채 신음하던 이 사병의 귀에 희망이란 한마디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춥고 긴 밤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해가 뜰 때까지만 살아있으면 죽지않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가 다시 생명을 얻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예수의 본을 따라 예수의 발자취를 닮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성경은 그것을 희망의 푯대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분명한 방향이 존재합니다. 특히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은 이러한 희망의 푯대를 전 생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믿음과 또 목표를 가르쳐 주셨다는 믿음 때문에 한결같이 희망의 푯대를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평생 그의 걸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바울의 달음질의 특징은 빠름이 아닌 한결같음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결 같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걸음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간 광야는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천천히 걸어가시는 하나님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한발자국씩 하나님을 따랐더니, 드디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빨리하고 빨리 도달하려는 욕망 때문에 스피드를 내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대부분은 과속에서 옵니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어린이는 성장하면서 나이마다 배울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선행학습의 부작용은 너무 빨리 배웠기 때문에,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승자의 속도는 빠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남의 스피드가 어떻든 자기 페이스대로 달리고 남의 장단이 어떻든 자기 장단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희망의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페이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곧 나의 달음질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18편 33절에 따르면 힘차고 굳센 발을 표현할 때 암사슴의 발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슴은 험한 비탈길을 올라가는 데 아주 능숙합니다. 그 비결은 반드시 앞발이 밟은 위치에 뒷발이 밟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도 산길에서 키우면 사슴의 비결을 본능적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슴의 앞발로 생각하고 믿음의 사람을 뒷발로 생각하여 말씀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가장 힘 있는 발걸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달음질의 목표와 푯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이 앞서 가셨습니다.
성숙한 경기자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미 코너스는 유명한 테니스 선수입니다. 그는 39살에 재기할 당시 그는 세계랭킹 74위에 불과했지만, US오픈 테니스에서 4강에 진출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의 나는 맞은편 선수와 심판만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관중들의 마음을 읽고 경기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이 변하길 바랬으나, 이젠 내가 그들의 뜻에 따라 변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바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쳐준 달음질의 삼박자는 희망으로, 한결같이, 부르심에 따라 달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달음질 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경주의 길을 참고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예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12:1~2)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한국 기독교는 대부흥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영적대각성 100주년을 맞아 그 실천을 위해 8월 23일 부산에서 감리교 영남선교대회를 개최합니다. 영남지역의 부흥과 감리교회가 하나되는 신령한 축제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역사를 위해 많은 기도와 헌신을 하시는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피부로 가장 잘 접하는 당사자이겠지만, 영남지역은 복음의 사각지대처럼 느껴집니다.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지역입니다. 삼남연회에서 감독을 지내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서울에서 수 천 명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영남에 내려오면 수 백 명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영남지역에서 감리교 목회가 어렵다는 이야기 일 테지만, 오랫동안 귓등에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심지어 우리 감리교회가 영남 어느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단시비를 당한다고 들었습니다. 수도권과 중부권에서 차지하는 우리 감리교회의 높은 위상과 견주어 볼 때 비록 지역 텃세를 감안하더라도 현실은 너무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제 영남선교대회를 통해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복음을 위한 일치된 순종을 이 지역에 마음껏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영남선교대회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의 디딤돌이며,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의 주춧돌이라고 믿습니다.
며칠 전에 부산지역을 가보니 부산은 불이 붙었습니다. 이단소리를 들으면서 어려움과 무시를 겪었던 부산지역 감리교인들은 전국의 감리교회가 함께 하는 영남선교대회를 위해 얼마나 기대하며, 준비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결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3년 전에는 비록 광주에 감리교회가 10개 밖에 없었지만, 호남선교대회의 성공으로 광주에서 감리교회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때 훈련된 전도대가 제주로, 부산으로 열심히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다니고 있습니다.
서울연회에서는 KTX 차량을 통째로 이미 전세 내었습니다. 가장 많이 오는 것으로 파악된 인천남지방은 버스를 27대나 예약했습니다. 성동지방은 900여명이 함께 KTX를 타고 방문합니다. 또 감리교회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는 전도대 300명을 하루 전날 먼저 보내고, 또 강원도 화천지방에서는 수요일 밤에 미리 출발한다고 하고, 또 인천의 어느 교회는 아예 전 교회 수련회를 부산에 와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산의 조장로님은 영남선교대회 기념으로 예배당 건축과 원로 목사님들의 쉼터를 위해서 금싸라기땅을 기증하셨습니다. 심지어 미주특별연회에서 100명의 대표단을 파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치된 순종’이요, \\’희망 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계속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동과 감사가 연출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오늘날 너나없이 영적부흥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결코 구호에 그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영적각성운동이고, 새로운 헌신운동입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부터 먼저 “신실한 사람들”로 거듭나고, 영적인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민족과 사회를 향해 강력한 희망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희망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제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18세기 영국을 변화시켰듯이, 20세기 초에는 하디 선교사가 영적 새바람을 통해 부흥의 기초를 쌓았듯이, 21세기 벽두에는 우리 감리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부흥운동을 주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관교회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이 교회를 통해 지역 사회에 희망의 선물을 나누어 주게 하시고, 이 민족을 위한 희망의 도구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주는 왜관교회”, “영적각성을 주도하고, 부흥을 선도하는 희망달리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