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연세목회자 신학세미나 개강예배 설교(2007.6.18)
예수를 바라보라
히브리서 12:2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올해로 27주년을 맞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학세미나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목회 풍토와 문화를 새롭게 갱신하는 지성과 영성의 훈련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요즘 흔히 삶의 방식으로 웰빙에 대해서 말합니다만, 저는 우리 목회자들 역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4S 입니다. 첫째는 심플 라이프(Simple life)이고, 둘째는 스몰 라이프(Small life)이며, 세 번째는 스마일 라이프(Smile life) 그리고 마지막은 스피리추얼 라이프(Spiritual life)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행복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미나에 참석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미 새로운 삶에 대한 선택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린 4S 정신에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플한 것입니다(심플 라이프). 둘째로 이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 규모를 집중시키고, 포기하지 않으면 읺될 것입니다(스몰 라이프). 셋째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스마일 라이프). 마지막으로 강의를 듣고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영적인 깨달음과 성숙도 가능해질 것입니다(스피리추얼 라이프).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투자가 참 부럽습니다. 저는 이 세미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을 새롭게 뜨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눈을 의미하는데, 바로 예수를 바라보려는 새로운 결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그 분을 섬기기로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대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아직 구분하지 못한 채, 혼동스러워 하는 히브리인 개종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신가를 가르치면서 그 방법으로 모세와 비교하기도 하고, 제사의식을 통해 새로운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기도 하며, 옛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태로 하여 태어났지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7장 22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우리가 믿고 또 바라보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미국 주간지 <타임즈>는 밀레니엄 특집 기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예수를 꼽았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위대한 인물에 머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고 물으셨습니다. 또 이어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라고 물으십니다. 바로 예수님은 남들의 평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나 자신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고, 그의 길을 따라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전에 십자가는 범죄자의 형벌도구였으나 이제 구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의 동행자이시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평생 예수를 부르짖고 살았던 분입니다. 당시 이용도 목사님이 고백하는 예수는 기성교회가 고백해 온 예수상과 달랐기 때문에 배척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예수 이해는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제도교회 목사들이 요구하는 예수는 “몸 육(肉)의 예수, 영화로울 영(榮)의 예수, 부할 부(富)의 예수, 높을 고(高)의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가 주장하는 예수는 “신령한 령(靈)의 예수, 천할 천(踐)의 예수, 가난할 빈(貧)의 예수, 낮을 비(卑)의 예수”입니다. 이용도는 당시 기성교회를 향해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하여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활의 중심 초점은 예수뿐이다.“
이용도 목사가 주장하는 목회관에 따르면, 한마디로 예수에 미친 믿음이요, 예수의 인간의 벽을 허무는 무차별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님의 주장대로 예수를 더욱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는 죽이고 옷만 나누는 현대교회”라는 그의 비판에 겸허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들입니다. 그런데 처음 고백처럼 그렇게 참되고, 진실하게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는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사실 우리의 목회를 돌아보면 반성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목회를 반성하고, 성찰할 기회가 없다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요즘 목회자들은 예외 없이 마치 경주하듯 뛰어다니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목회는 경쟁사업이 되었고, 인간관계도 온통 비지니스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목회자들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존경쟁을 위해 이젠 웬만한 부조리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어린이는 성장하면서 나이마다 배울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선행학습의 부작용은 너무 빨리 배웠기 때문에,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안다고 착각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이젠 좀 천천히 배우며, 이젠 좀 천천히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평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평생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라야 하는 사람들인데, 마치 야고보와 요한처럼 영광된 자리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잘못 바라보았기에 요즘 우리 사회는 영혼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를 잘못 증거했기에 우리 교회는 영적인 혼란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나락으로 몰아갑니다.
현대인들은 영혼의 갈증을 호소하면서도 오히려 교회 밖에서 정신적 안전망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상, 요가, 기수련, 마음 수행 속에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고, 심령술과 초자연 현상 따위에 관심을 보이며 영적인 것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의 이정표를 바르게 세우지 못했기에 개인의 고독, 갈등, 아픔,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역사적 위기, 생태계의 위기 등을 수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과 행위들은 ‘깊은 위기에 빠진 문화와 그 위기에 대한 잘못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 금지와 배격은 영적으로 바로 서려는 신앙개혁운동이었던 것처럼,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결단과 개혁이 필요한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윌리암 거널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볼 수 있지만, 너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결코 가릴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시현상과 색맹현상을 바르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바르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오늘의 교회가 현대의 물신종교와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에너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가장 큰 것을 믿는 자는 가장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누구든지 영적부흥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주장합니다. 내적으로 영적 능력을 잃고, 외적으로 신앙의 영향력을 점점 상실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대부흥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1903년 원산의 감리교 선교사 집회에서 시작한 회개와 기도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어느 교파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민족과 교회를 향해 희망이 되었던 신앙운동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을 믿음으로 반성하고, 새로워지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영적각성운동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데서 부터 출발합니다.
유태인들은 바지 호주머니 양쪽에 작은 조약돌을 하나씩 넣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른쪽 바지에 있는 조약돌을 만지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온 우주 만물을 만들어 주셨구나” 생각하면서, 자신의 엄청난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왼쪽 바지의 조약돌을 만지면서 “나는 흙에서 지어져 흙으로 돌아갈 허무한 인간이구나”를 깨닫고, 늘 겸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거룩한 사역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증거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푯대를 향해 달음질한 바울의 삶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다는 믿음과 또 목표를 가르쳐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3:12).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를 바르게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나 자신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던 바울 사도의 고상한 결심이 바로 나 자신의 결심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이번 신학세미나를 통해 나 자신이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새롭게 되고, 우리 교회가 말씀 안에서 참되게 서며, 한국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