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조찬기도회 설교(2007.4.18)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
시편 85:8-13 요한 20:19-2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시민저항전통의 뿌리가 된 4.19 민주혁명 47주년을 맞아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벌써 이 예배가 스물다섯 번째를 맞는 다고 하니 그동안 ‘4 .19 민주혁명 국가조찬기도회’를 주관해 오신 여러분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 역시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고, 그 불우한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4.19세대임에도 그 역사의 교훈을 뒤 늦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의 교훈은 당장 나타나는 열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 뜻을 계승하고 가꾸면서 꽃을 피우는 씨앗이었다는 점에 말입니다.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과 피를 흘렸으며 희생되었습니까?
이제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은 후에 비로소 지난 20년 전부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단초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19 민주혁명은 완성된 혁명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출발점이었고, 우리 사회의 오늘을 만들어낸 가장 건강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날, 그 희생자들은 진정한 시대의 선각자요, 민족의 선구자였음을 믿습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사회는 평화로운 봄을 맞을 수 없었습니다. 1960년 4월과 1980년 5월 그리고 1950년 6월은 이 민족에게 커다란 상처로 각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늘 고난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부활의 시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민족 전체가, 남과 북이 평화로이 하나 되고, 자유롭게 번영하는 그날일 것입니다. 당시 4월의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분단된 민족의 하나됨이요, 온전한 정의와 평화의 실현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그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릴 뿐 만 아니라, 회복하고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온 땅에 가득하고, 사람의 삶과 공동체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시편 85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이시리라.”(시 85:9)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소원과 의지를 드라마틱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시 85:10-13)
흥미로운 것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사랑, 진실, 정의, 평화와 같은 매우 추상적인 낱말들을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남녀 간의 애정으로 의인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눈이 맞은 젊은 남녀가 입을 맞추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사랑, 진실, 정의, 평화와 같은 특별한 낱말들은 사실 먼 이야기가 아닌 아주 가까운 일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는 표현처럼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헤아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손꼽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는 이슬을 머금은 새 풀처럼 성장케 하시나, 사악한 자는 가시나무를 잡았다 금방 버리듯이 하나님이 버리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의 교훈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평화, 샬롬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샬롬은 단지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 직후,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이 있을찌어다”(요 20:19, 21, 26)라고 인사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고난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은 평화였습니다. 그 따듯한 주님의 문안에는 한 인간의 평안과, 우리 사회의 평강과, 온 세계의 평화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뜻을 온전히 실현해야 합니다.
그동안 이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도피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도피함으로서 오는 평화입니다. 도피의 평화는 당연히 사물을 직시하고 현상을 돌파해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문제를 극복하는 평화였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입니다. 슬픔이나 고난, 위기나 박해도 그것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화를 얻기 위해 오히려 권력자 앞으로, 십자가 위로 나서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요 14:31).
저는 우리보다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발걸음 속에서 47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연상하였습니다.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우리는 흔히 평화는 힘이 센 사람이나 배부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을 보면 강자가 저지른 전쟁이 그쳤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처럼 또 다른 힘이 나타날 경우에는 위태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평화는 힘에 의한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위세를 부리는 강자보다 고난을 겪는 약자들에 의해 평화가 모색됨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물질적 풍요만이 인간의 고통과 억압을 해소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면 범죄의 가능성이 있고, 가난은 반사회적이며 따라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빵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굶주리신 예수를 빵으로 유혹하고 굴복시키려 하였던 악마는 지금도 힘과 빵의 유혹으로 지금 우리의 평화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참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평화를 얻기 위한 도상에 서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평화를 모색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는 소극적인 데서, 궁극적 구원에 이르는 적극적인 데로 나서는 것임을 믿습니다.
4.19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서시는 여러분은 참 평화이신 주님의 선물을 찾고, 또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옛말에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가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정의를 바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정의를 통한 평화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분단 시대는 우리에게 갈등, 독점, 힘, 증오야말로 참된 정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만남, 나눔, 관용, 화해를 통한 정의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참된 정의와 평화의 만남과 실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위해 간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여러분에게 복을 베푸시어, 평화를 수출하고, 번영을 나누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