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지방 지방성회 설교(2007. 1. 19)
영적으로 부요한 삶
딤후 4:6-8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캐나다지방과 여기에 속한 24 교회와 동역자들, 그리고 오늘 거룩한 성회에 참석한 사랑하는 교우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올해는 정해년, 돼지해여서 대단히 기대가 큽니다. 600년 만에 돌아오는 황금돼지해라고 모두들 돼지꿈을 꾸고, 복이 터지기를 손꼽고 있습니다. 물론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돼지꿈이 가져다줄 행운은 큰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정초인데 올해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에 언제나 함께 하셔서, 기도하고 계획하는 일들마다 좋은 응답이 있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특히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이루어 가는 데 앞장서시고, 여러분 자신이 희망의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는 월요일에 캐나다연합교회를 방문하여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와 선교협약을 맺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작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캐나다연합교회의 이상철 목사님께서 방문하셨고, 또 신상철 감리사님을 비롯해 관계자 목사님들과 선교협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 협약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지방에 속한 감리교회들에게 좋은 선교의 지평이 열리고, 이민목회에 대한 활성화가 되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감독회장이 된 이래 매 주일마다 전국교회를 심방하는 마음으로 찾아 가서 말씀도 전하고, 형편도 살피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은 예전에 한 교회의 목회자로 일할 때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오늘 멀리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캐나다지방을 심방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향교회 이야기를 하나하겠습니다. 올해 첫 주일에는 좀 특별한 곳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본부 임원들과 함께 전라남도 해남 땅 끝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약세지역인 전남서지방으로, 그곳 해남군에는 작고 가난하지만 열 개 감리교회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1박2일 그곳을 방문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비록 교세는 약하지만 젊은 목회자들은 서로 한마음이 되어 협력하였고, 열심히 나눔의 목회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들이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기에 “적은 예산으로 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참 눈물겨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회마다 뜻을 정하고 지난 2년 동안 폐품 수집을 하여 3천만 원의 기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해남군 행정기관에 알려지게 되어 기관마다 적극적인 협조를 해 주어 독거노인을 돕는 일에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감리교회의 브랜드가 높아지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준비한 격려금을 교회가 분배하는 것보다 행정기관에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쌀 120 포대를 전달하고 지역관계자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주일 새벽에는 땅 끝 마을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 신년예배를 드렸고, 주일 낮에는 해송교회에서 주일예배 드리며 성찬식을 가졌으며, 건축 중인 서정교회, 해남지역 신년연합예배, 그리고 사고로 투병중인 여성 목회자의 병상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희망심방 일정을 마쳤습니다.
땅 끝 마을에 대통령은 다녀갔어도 감리교 감독회장은 첫 방문이라고, 만날 수 있는 기쁨 때문에 밤을 설쳤다는 어느 노인 교인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새해 첫 주일을 맞아서 서울 감리교 본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 끝을 찾아간 까닭은 먼저 가장 변두리에 있는 사랑하는 감리교인들께 새해 문안을 드리고, 또 남해 앞바다에서 시작하는 봄의 기운을 몰고 서울까지 올라오려고 찾아 간 것입니다. 저는 봄소식, 꽃소식이 북상하듯이 우리 감리교회가 추진하는 희망의 메시지들이 광주와 대구, 대전을 거쳐서 서울까지 그리고 평양과 북만주까지 북상하고 전파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이러한 희망의 봄기운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 캐나다지방과 토론토까지 불어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올해는 한국기독교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대부흥은 사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감리교회의 하디 선교사와 감리교인들이 부흥운동의 주역들이었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고향이 어디 인줄 아십니까? 바로 캐나다 토론토입니다. 토론토에서 자란 의과대학생 출신 선교사의 헌신이 한국사회를 영적으로 불질렀습니다.
우리 감리교 본부에서는 지난해 5월 24일 웨슬리 회심기념일에 양화진에 있는 하디선교사 가족 묘역에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딸 둘이 양화진에 묻혀있었습니다. 영적인 헌신은 이러한 육적인 아픔을 하께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처음부터 성공한 선교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부흥운동 이전에 제출했던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 후에는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즉 실망이 희망으로,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와 중생의 체험 때문입니다. 당시 회개의 내용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 은총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편안하게 자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충격과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회개 과정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남감리회에 소속된 한국인 전도자 중에 윤승근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선교사 밑에서 매서인으로 일하면서, 자기가 조금씩 빼돌린 돈이 7달러라고 회개하며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이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윤승근은 이전에 횡령한 것도 생각나는 대로 갚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옛날 인천 주전소에서 근무할 때 횡령한 돈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그 돈을 갚기 위해 쓸 것을 쓰지 않고 겨우 돈 20원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천주전소가 폐쇄되고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 탁지부 괸리는“참 희한한 일도 있다”면서 영수증을 써 주었는데, 그 영수증 이름이 ‘양심전’이었다고 합니다. 양심전은 신앙을 통해 양심을 회복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구체적인‘회개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웨슬리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로교는 ‘지키는’ 교회이고, 감리교는 ‘바꾸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 칼뱅과 존 웨슬리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교리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입니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회는 늘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회심을 하였고, 성공회가 금지하는 옥외집회를 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낮아졌으며,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요, 가슴이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희망의 공동체였고, 이제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에게 영적 부요함과 풍성한 삶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딤전 6:6). 그는 이 세대의 부자들에게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사도 바울의 유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가 얼마나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았는지 귀를 기울여 봅시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의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6~8)
이 말씀은 바울의 묘비명에 어울릴만한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할 시점에 마침내 이르렀다는 본문의 말씀처럼 완전하고도 생생한 묘사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건 인생을 살았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그의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때, 즉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라는 이름의 사람이 내일이라는 사람을 찾아와 장래에 도움이 되겠는 말을 하겠노라며 충고를 했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청년 시절에는 무슨 일에도 큰 보람을 갖고 있었고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차례 꿈을 꾸는 동안 즐거운 때는 지나가고 혼자 뒤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깨어났을 때 그 이름이 바뀌어 오늘로 되어있었습니다. 나는 놀라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으나 뛸 수 있는 거리는 너무나 짧았고 그날도 저물어 다시 이름이 바뀌어 어제가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채 반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물론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그러나 한차례 꿈을 꾸고 나면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만약 무슨 일이 하고 싶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당신도 머지않아 오늘이 되고 어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생 자신이 메었던 멍에를 벗긴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족쇄를 늦춘다는 뜻이며, 셋째는 천막의 로프를 푼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에서 죽음 곧 떠남은 자유, 해방, 새로운 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여행, 승리의 삶을 산 후 면류관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부요함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일찍이 빌립보서 3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빌 3:12) .
그는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 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달리는 도중 이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시간을 붙잡고 달리며, 어리석은 자는 시간에 쫓겨서 달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지혜로운 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지만, 어리석은 자의 행복은 경주가 끝나봐야 결정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삶은 신앙생활의 과정이요, 동시에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해 이미 자족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 번째로 바울은 어느 상황이든지 자신의 희망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의 주변 상황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합니다. 당시 바울 곁에서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갔으며, 오로지 누가만 남아서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조력자였던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복음을 저버리고 떠난 사실입니다. 그는 바울만 배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일평생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던 바울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몇 벌의 옷과 책들 뿐 이었기에 디모데가 올 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가정과 재산과 명예를 모두 내버리고 오직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그와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누구나 자기 고유의 멍에를 메고 삽니다. 쉽게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사람마다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는 얼마나 무덥고 또 애착이 많이 있습니까? 사실 이민자의 외로움이나 힘겨움을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종종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친지를 통해 이민자의 고단한 생활을 듣곤 합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나 이민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행여 물질적 만족이 있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러한 십자가를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는 짊어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각자 자신이 짊어져야할 인생의 짐을 지고 뒤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평생 십자가로 삼은 한국 땅에 오신 하디 선교사님 이야기를 계속 드리겠습니다. 하디 선교사님의 첫 선교지는 지금의 철원인 지경터였습니다. 그곳은 우리 감리교회의 역사적 유산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일제시대에 순교자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고, 무너진 철원제일교회는 평화로운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하디 선교사님은 선교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역량 부족과 영적 능력의 결핍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3년 동안 남감리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애써 일을 하였으나 선교사업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한 고백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운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1903년 8월에 남감리회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사경회를 열던 중, 하나님의 은혜가 소나기처럼 내리는 큰 감화와 능력을 받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간절한 심령으로 구하던 하디 선교사님의 가슴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갈급한 심령으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하디 선교사님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과 믿음의 부족함과 모든 죄악을 자복하니 회중도 강한 죄의식과 믿음의 부족함을 비로소 깨닫고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구하고, 사모함으로써 주님의 능력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윤리적으로 성숙함으로써 가능해 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한 회개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철저한 말씀중심의 교회,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 이것을 통해 교회는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부흥은 회개라는 잿더미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영적 부흥은 화해라는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적 부흥은 거듭난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영적으로 각성케 하는 은혜를 허락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 감리교회 전체가 희망의 교회로 변화되고, 희망의 공동체로 재창조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가 희망을 이루어 가기 위해 먼저 영적각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굳게 믿습니다. 또 영적으로 각성된 감리교인들이 철저하게 감리교인다운 감리교인으로 생활이 변화되는 경험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처음 메도디스트들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이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작년 10월에 열린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7회 총회는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이때에 우리 감리교회가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로 거듭나야 함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희망 프로젝트‘를 제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대각성100주년의 실천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캐나다지방 여러분에게도 우리 감리교회가 전개하는 ‘희망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원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눈을 허락하시줄 믿습니다. 요셉과 같이 형통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의 눈물을 허락하시고, 웨슬리의 뜨거운 가슴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의 아름다운 열매와 성취를 위해 먼저 여러분께서 기드온의 300 용사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파송하여 추수꾼으로 삼으신 70명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당부합니다.
성령이 강림했던 초대교회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풍요해 지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처럼 낮아지고, 내려놓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희망의 청지기로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 맨 발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희망의 청지기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적인 변화를 시작해 봅시다.
삼중장애에 시달렸던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볼 수 있으면서도 비전이 없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매일 조금씩 개선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일 월드컵의 영웅인 히딩크 감독도 날마다 1%씩 바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향하여 거룩한 꿈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로의 남은 생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제 여러분의 희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또 여러분에게 묻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희망을 보여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우리 속에서 넘쳐나는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호 12:6).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든든히 서가며, 세계와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주는 캐나다지방”과 희망을 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