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1-23 희망 프로젝트 정책대회 개회예배 설교
희망의 삼위일체
호 12:6, 벧전 3:15
할렐루야!
‘희망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정책대회에 참석하신 지도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자리와 기회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우리 감리교회가 나날이 새로워지고, 든든히 서가며, 세계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제 본부 임원회에서 오늘 열리는 정책대회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방 감리사님들이 임기가 다 되어서 그런지 참석율이 저조하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런 의논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내년 연회 때 새로 감리사 뽑고 나서 대회를 열면 그동안 6개월은 허송세월로 지나간다, 그러니 연말부터 ‘희망프로젝트’의 발동을 걸기 위해서는 이미 임기말이어서 지방마다 레임덕은 있겠지만 감리사님들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리사님들에게는 임기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감리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영원히 존재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프로젝트는 임기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임기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행여 이번에 참여하지 못한 지방 감리사가 있다면 여기에서 논의된 내용을 빠짐없이 알 수 있도록 본부에서 후속조치를 취해 주시고, 연회 차원에서도 독려해 주시고, 또 산하 평신도단체에서도 적극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처음 갈 때 참 지루하게 비행기를 탄 일이 있습니다. 겨우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한 후 마음을 놓았는데, 그 때 기장의 인사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기억에 대충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배드(bad) 뉴스와 굿(good) 뉴스가 있습니다. 배드 뉴스는 지금 밖에 비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굿 뉴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군요.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세상에는 배드 뉴스가 있으면, 동시에 굿 뉴스가 있구나!”저는 비행기가 양 날개를 통해 날아가듯이, 세상을 ‘굿과 배드’ 좌우 두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평범한 상식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저는 한편으로 배드 뉴스 때문에 우울하고, 또 한편으로 굿 뉴스 때문에 즐거워 하였습니다.
배드 뉴스는 요즘 비난받는 부동산 광풍에 관한 기사입니다. 아파트값이 폭등을 하고, 그 와중에 몇 억씩 부당한 수익을 얻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들여다보면 평생 목회한 목사님들의 경우 반 지하 연립주택도 없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동산 광풍을 지켜보니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더욱이 41퍼센트나 되는 미자립교회 동역자들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더욱 답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 뉴스도 있었습니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직업만족도 조사를 했는데 그 중에 성직자가 아주 상위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의사와 모델 등 화려한 직업은 만족도가 대단히 낮았고, 작가와 성직자, 작곡가 등은 아주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 결론은 창의적이고, 봉사하는 직업인들의 직업만족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파트로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삶은 얼마나 축복된 인생입니까?
저는 희망도 이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 눈을 씻고 찾아보더라도 우리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배드 뉴스가 있으면 굿 뉴스가 있듯이, 양 날개로 지켜보면, 두 눈으로 바라보면, 항상 희망을 찾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눈을 허락하시줄 믿습니다. 요셉과 같이 형통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의 눈물을 허락하시고, 웨슬리의 뜨거운 가슴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난 제27회 총회를 마치고나서 많은 분들이 특별히 생산적인 총회였다고 치하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과거에 열렸던 총회를 돌아보면 과열된 감독선거 분위기 때문에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독선거와 총회가 분리됨으로써 정책다운 정책을 다루었으며, 그 결과 ‘희망 프로젝트’가 공론화되었습니다. 오늘 모인 정책대회는 희망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하여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이루어 가려는 기도와 의지를 모은 결과입니다.
‘희망 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감리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다시 부흥할 능력을 얻으며, 세상에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되기 위한 ‘희망 전략’입니다.
따라합시다.
희망프로젝트는/ 첫째, 감리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둘째, 다시 부흥할 능력을 얻으며/ 셋째, 세상에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되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 감리교회의 신앙적 강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웨슬리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년이면 감리교 하디 선교사로부터 불이 붙은 영적대각성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왜 100년 전의 영적대각성운동이 중요합니까?
100년 전, 영적대각성운동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인들의 아버지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 영적대각성운동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한국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르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 영적대각성운동을 통해 비로소 성령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개인 개인이 뜨겁게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희망의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무력감과 절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민족과 역사 앞에서 시대를 선도해왔던 종교임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시대와 세상에 대한 주도적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교인이 감소하고, 비기독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도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7, 80년대에 10년 단위로 200 프로씩 성장하던 교회가, 지난 10년 기간에는 오히려 14만 4천명이 감소하였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고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영적대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 우리 감리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영적으로 각성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며, 하나님만 바라는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호 12:6).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18세기 영국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20세기 초에는 하디 선교사가 영적 새바람을 통해 부흥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벽두에 우리 감리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부흥운동을 주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훌륭한 신학이 있습니다. 훌륭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훌륭한 전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웨슬리 영성입니다.
미국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은 침례교인을 배우라/ 교회충성은 루터교인을 배우라/ 교인의 긍지는 성공회를 배우라/ 단순한 믿음은 퀘이커교도를 배우라/ 종교를 높이는 태도는 유대교를 배우라/ 기도생활은 장로교인을 배우라/ 봉사생활은 구세군을 배우라/ 교회를 널리 들어냄은 천주교를 배우라/ 기쁨에 찬 신앙은 흑인들을 배우라.”
그러면 감리교회는 무엇일까요?
“진실한 생활은 감리교인을 배우라”입니다.
저는 이 한마디에 우리 감리교회의 본질이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믿을 신(信)과 열매 실(實), 즉 신실은 존 웨슬리의 ‘의인과 성화’의 신학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감리교회가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존 웨슬리의 ‘칭의와 성화’ 교리가 전 세계적으로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까지 공감하고, 일치할 만한 최고의 신학임을 보여줬다는 것은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이고, 대단한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웨슬리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로교는 ‘지키는’ 교회이고, 감리교는 ‘바꾸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 칼뱅과 존 웨슬리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교리를 수호하고, 제도를 수호하고, 질서를 수호하는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입니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회는 늘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뜨겁게 회심을 하였고, 성공회가 금지하던 옥외집회를 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낮아졌으며,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요, 가슴이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희망의 공동체였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정책대회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자랑스런 목회자와 평신도로서 희망의 비전을 공유하고, 웨슬리의 영성을 계승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의 삶을 위해 기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희망프로젝트를 실천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우리 감리교회와 감리교인들이 “신실한 사람들,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함께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처음 감리교인들의 모습, 그 가슴 뜨거움, 그 정직하고 신실함, 그 복음에 대한 열정, 그 사회의 질병을 고치려는 의지,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헌신을 닮아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라는 주제가 가슴에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붐을 일으켰던 “300만총력전도운동”은 김진호 감독님처럼 참으로 화끈하기도 하고, 가슴에 탁 들어오기도 하는데, ‘희망’이란 개념은 좀 미적지근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실무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도 했습니다만, 결국 ‘희망’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희망’이란 단어만큼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소중한 개념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오죽하면 독일의 시성 괴테는 “희망은 제2의 영혼”이라고 말하였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 없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희망을 실감나게 느끼기 어렵습니다. 희망 없는 사람이 말하는 비전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말이나 행동이 늘 부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사실을 왜곡합니다. 엄두도 내기 전에 미리 겁을 집어먹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제 입으로 다 까먹고 맙니다.
<불가능은 없다>를 쓴 로버트 슐러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전도 없다. 모든 문제에는 해결방법이 있다. 결국 문제의 크기는 꿈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따라서 문제가 인생을 재미있게 만든다”.
우리가 희망을 말하는 이유도 똑 같습니다. ‘희망’을 지닌 사람은 문제조차도 도전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입니다.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남다른 삶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우리를 살맛나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지도자 여러분!
저는 우리 감리교회가 잘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본부와 연회, 지방회, 개체교회와 평신도단체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먼저 우리 감리교 전체에 불신과 불안감을 극복하고 희망의 전달자가 되십시다.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 각성하고, 새로워져서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되십시다.
정책대회는 불과 만 하루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여러분의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결단을 함께 묶어 주셔서 더욱 풍성하고, 비전으로 가득한 ‘희망프로젝트’를 계획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희망’이 미지근할 지 몰라도 여러분이 따듯하게 덥혀 주시고, 뜨겁게 달궈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와 시시각각 순교의 위협 속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희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4-16).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용광로처럼 타오르게 하시고, 성령의 불쏘시개로 뜨겁게 하셔서, 이 시간 정책대회를 통해 희망이 더욱 확산되고, 희망이 더욱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