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8-28 부흥단 컨퍼런스 설교
최고의 영성,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 2:5-11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감리교 부흥단이 주관하는 교역자 영성 컨퍼런스와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제 무더위가 가시고 찬란한 가을이 성큼 다가섰습니다. 기도하기에 참으로 좋은 계절입니다. 영성의 풍성함을 소망하며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선물을 허락하시길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하늘양식을 충만히 예비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전에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도 많고, 성령을 고대하는 가슴도 뜨거웠으나 요즘은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 시대가 달라지고, 세태가 바뀐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교역자의 영적생활까지 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은혜 받는 집회마다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열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부흥단이 앞장서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다시금 영적으로 뜨겁게 불붙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도와 전도, 헌신과 희생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용광로처럼 불 싸안은 성령의 역사로서만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영적 리더십의 기본은 기도요, 리더십 중의 리더십은 기도의 본보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위대한 신앙인 파스칼은 “온갖 좋은 것과 함께 있을 때 지옥을 경험한다. 다 버리고 홀로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사람의 고결한 자세를 듣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리를 이탈하여 자주 홀로 남으시고, 철저히 자신을 겸비하게 비우셨듯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복된 무릎을 꿇는 자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내년에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사실 100주년, 200주년이란 기념일이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100주년 대회를 열고, 체육관집회를 대규모로 개최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나 경건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적각성을 위한 행사는 많이 있지만, 영적각성의 실천에 대한 생활이 부족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라고 말하였습니다. 진정한 영적각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고, 그리스도의 본받는 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의 최고의 영성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나 자신이 먼저 새로워져서, 나를 통해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실 날마다 외적인 모습은 낡아가지만, 이젠 내적인 모습은 점점 젊어지고, 푸르러지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흥단이 앞장서서 더욱 성숙하고,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난 선교 120년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큰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교회는 사회로부터 많은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선교 초기에는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면서 신뢰를 받았지만, 오늘에 와서는 분열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감독회장이 되면서부터 ‘희망의 전도사’ 노릇을 자처한 까닭은 바로 교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와야만 교회가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는 결코 추상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저는 “희망이란 말이 너무 구체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을 찾기 위해 너무 주변을 둘러보거나, 높이 쳐다보지 마십시오. 바로 ‘나 자신이 목회자로서, 장로로서,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이 지역사회에서 희망있는 존재로 바라보는가?’ 를 먼저 판단해 보십시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오늘 우리 교회가,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예수’, 입으로만 ‘주여’를 외칠 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지만, 내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가장자리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지만 청지기의 노릇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색은 겸손과 복종과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길을 원치 않았고, 다만 하나님의 길을 원했습니다. 주님은 높임을 받기보다, 인간을 위해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교회든 어느 공동체든 질서나, 말이나, 인간관계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문제라면 저는 그리 큰 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늘 서로 다른 의견이 있게 마련이고,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갈등과 위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과 위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갈등과 위기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갈등과 위기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더 큰 위기는 교회의 존재 의미와 목적, 정체성 등이 확실치 않을 때 찾아옵니다. 제가 본부행정을 보니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딱 정답이 나오는데도, 사람들끼리 모여서 심사를 하고, 재판을 하면서 이해관계에 끌려 다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하나님의 개입과 중재는 외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일을 피해 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시고, 철야하시고, 금식하셨는데, 우리 교회는 주님을 섬긴다면서 늘 내 편과 우리 이익과 내 배를 섬기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실패의 원인은 연약함에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자신의 삶속에서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 못지않게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깊은지,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우리의 주님 안에서만 참 존재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낮추시고, 스스로 종이 되시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주님의 모범을 닮아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달으며,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과 죄인임을 고백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인격을 새롭게 하시고 성숙한 삶으로 이끌어 나가십니다.
내년도는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대부흥은 사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감리교회의 하디 선교사와 감리교인들이 부흥운동의 주역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부에서는 지난 5월 24일 웨슬리 회심기념일에 양화진에 있는 하디 선교사 가족 묘역에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부흥운동 이전에 제출했던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 후에는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즉 실망이 희망으로,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와 중생의 체험 때문입니다. 당시 회개의 내용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 은총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편안하게 자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충격과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회개 과정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남감리회에 소속된 한국인 전도자 중에 윤승근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선교사 밑에서 매서인으로 일하면서, 자기가 조금씩 빼돌린 돈이 7달러라고 회개하며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이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윤승근은 이전에 횡령한 것도 생각나는 대로 갚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옛날 인천 주전소에서 근무할 때 횡령한 돈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그 돈을 갚기 위해 쓸 것을 쓰지 않고 겨우 돈 20원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천주전소가 폐쇄되고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 탁지부 괸리는“참 희한한 일도 있다”면서 영수증을 써 주었는데, 그 영수증 이름이 ‘양심전’이었다고 합니다. 양심전은 신앙을 통해 양심을 회복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구체적인‘회개의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웨슬리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로교는 ‘지키는’ 교회이고, 감리교는 ‘바꾸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 칼뱅과 존 웨슬리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교리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입니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회는 늘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회심을 하였고, 성공회가 금지하는 옥외집회를 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낮아졌으며,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요, 가슴이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희망의 공동체였고, 이제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가 희망을 이루어 가기 위해 먼저 영적각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굳게 믿습니다. 또 영적으로 각성된 감리교인들이 철저하게 감리교인다운 감리교인으로 생활이 변화되는 경험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처음 메도디스트들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이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이 앞장서서 존 웨슬리처럼 성령의 불쏘시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뜨거운 성령체험으로 여러분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헌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역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길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역자들은 세상의 누구에게나 드릴 수 없는 사랑과 충성과 복종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영적각성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랜 타성에 젖었다면 그 타성을 깨어 나가고, 지금까지 우리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미래로 방향타를 옮겨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웨슬리 영성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의 주역으로 든든히 세워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