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8-07 유럽지방 유학생 성회 개회설교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나니
미 6:6-8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유럽지방 유학생 성회와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또 멀리 유럽에 나와서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와 조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신경하 감독입니다. 좀 더 일찍 여러분을 만나서 격려도 하고, 유럽 생활 이야기도 듣고 싶었지만 이제야 기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유럽의 중심인 베르린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 진 줄로 믿습니다.
제가 들으니 유학생에게는 세 가지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유럽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공부는 언제 끝나느냐? .. 이런 질문은 대단한 프라이버시이고, 또 부담을 주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미 위대한 출발을 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위대한 완성을 위해 늘 기도하고,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유럽까지 와서 유학하면서 살게 되셨습니까? 고향음식도, 그리운 친구도, 늘 쉽게 통하는 언어도, 뭐든지 척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한국 땅에서는 가능한데, 아마 유럽은 여전히 낯설고 종종 향수를 느끼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조국과 고향을 떠나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떠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제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당장 이제 두 살 박이 첫 손주와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컥 해집니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가족도 저와 똑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인류 전체를 위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을 애굽 땅에 팔려가게 하셔서 그곳에서 고난을 겪게 하신 일도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섭리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불러내시고,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하신 계획이 무엇인가를 늘 기도하며, 그 섭리 가운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기억하시고, 이름을 부르시고, 얼굴을 맞대시며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서울에서는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가 열렸습니다. 좀 쉽게 설명 드리면 세계감리교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이 대회는 감리교 선교 박람회요, 화해와 희망의 대성회였습니다. 전 세계 132개국의 7천만 감리교인을 대표하여 80여 개국에서 3천여 명이 대표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이곳 독일에서도 발터 크라이버 전 감독님과 로즈마리 베너 현 감독님이 대표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여러분이 기도해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를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많은 해외교회 지도자들이 귀국하면서 말하기를, 한국에서 열린 대회가 그동안 모인 대회 중에서 참가자도 가장 많았고, 또 프로그램도 풍성한 대회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전야제와 개회예배,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는 만 명 이상의 감리교인들이 모여 대회가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 대회를 통해 한국감리교회가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케 하시는 하나님”이란 대회 주제에 맞게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우리 감리교회가 지닌 존 웨슬리의 ‘칭의와 성화’ 교리가 전세계적으로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까지 공감하고, 일치할 만한 최고의 신학임을 보여줬다는 것은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이고, 대단한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계감리교대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일 것입니다. 전통과 제도는 바뀌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회를 치루고, 오늘 유학생 성회를 여는 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6).
여러분은 존귀하신 여호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갖고 나가려고 하십니까? 자랑스러운 학위입니까? 뛰어난 언어실력입니까? 남다른 학벌입니까? 예언자도 이렇게 고민합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7)
그는 최선의 헌신을 준비합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과 같은 강조법, 과장법을 사용합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처럼 ‘맏아들’을 제물로 드리고자 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의 몸까지 드릴 작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 받으실까요?
예언자 미가는 스스로 묻고 또 스스로 대답합니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아니다”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을 제물로써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는 당시 백성들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공의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루터가 생각할 때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행함을 통한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행하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묻고 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깨닫고 행하게 하려는 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고난당하는 것이다\”라고 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 세계감리교협의회와 로마 가톨릭, 루터교 세계연맹이 합의했다는 칭의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행함을 통한 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의’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여러분은 날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이 부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에는 그 양식이 떡인지, 밥인지 포괄적으로 썼지만, 영어 성경에는 “데일리 브레드”라고 빵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버터회사 사장이 교황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교황을 알현하면서 큰 007 가방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청을 했습니다.
“교황성하!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주기도문에 있는 구절 중에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라는 부분을 ‘빵과 버터’로 고쳐 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그때 교황은 아주 황당해 하면서,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 나는 한 구절도 고칠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버터회사 사장은 몹시 실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들고 온 007 가방을 열고는 가득 든 달러를 보여주면서, “이래도 안되겠습니까?”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교황은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대단히 실망한 버터회사 사장은 이제 포기를 한 채 문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교황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교황님! 죄송합니다만, … 그러면 빵회사 사장은 얼마를 가져 왔습니까?”
이 우스개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비록 과장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마음에 맞게 해석하고, 제 입장에 따라 이해하려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면서, 늘 부산을 떨고, 제 욕심을 차리고, 헌신과 결단을 다짐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3-24).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크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 가지 거룩한 단어인 ‘인애’, ‘공평’, ‘정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애(헤세드)란 무엇입니까? 이 낱말은 친절, 사랑, 자비, 인애, 우정, 긍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따스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어머니의 참사랑을 알고, 좋은 친구를 지닌 사람이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공평(미슈파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근원으로 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삶의 도리이며, 원칙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직(체다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그 계약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즉 인간 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포함하며, 공동체의 평안과 질서를 이루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말하는 ‘의’가 바로 체다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가 바로 미슈파트와 체다카를 가지고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7)
그럼에도 우리는 늘 딴 자랑을 일삼는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랑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랑이 넘쳐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연예인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면 칭찬을 듣고, 선망의 대상이 될 줄 알지만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정직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복음교회 운동을 시작한 최태용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자랑을 가졌다. 바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자랑이다. 우리의 자랑이 주의 영광이 되는 의미에서 자랑이 많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입니다. 그 인애, 그 공평하심, 그 정직함.. 신비한 보석 이름과 같은 헤세드, 미슈파트, 체다카,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보화인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베르린에 꼭 와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곳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낸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곳이고, 우리가 비전을 가질 만한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계감리교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케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하신 놀라운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심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이 대회는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세계감리교회 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의 분단의 아픔과 극복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평화와 통일 그리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세계교회가 한 마음을 모으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기도 속에 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 고통을 겪는 북한동포를 포함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베르린과 유럽에 사는 여러분부터 우리 민족 전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잔치, 평화의 식탁, 감사의 축제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갈까?”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유럽에 사는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교회와 조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여러분을 통해 아름다운 결실을 허락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유학생 성회를 통해 숱한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시고, 저들의 미래를 약속하시며, 예비하신 모든 것을 풍성히 허락하실 것을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