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6-07 배재대학교 개교기념일 예배 설교
희망의 문
요 10:9-10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배재대학교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배재대학교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 우리나라의 다방면에서, 또 세계라는 무대에서 일할 지식인과 기술인을 양성하는 지성의 전당이 되길 바랍니다.
특별히 배재대학교 개교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121년 전 한국 땅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27세의 미국인 아펜젤러 목사였습니다. 그는 뜨루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갓 안수를 받은 젊은이였습니다. 푸른 눈의 젊은 목사가 19세기 말 거의 무너져 내리던 조선왕국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펜젤러 목사는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보고서와 일기, 편지들이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으로 남아있습니다. 배재학당이 의미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 세워진 학교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는 물론 오늘의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지난 121년 동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棟樑)을 길러왔습니다.
처음 배재학당의 출발점이 된 것은 영어를 가르쳐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동에 자리 잡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병원에서 진료할 때, 옆에서 돕는 한국인들이 영어를 못 알아들어 곤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들이 생겨났는데 지원자 가운데 스크랜턴이 추천한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으로 ‘학교’ 를 시작했습니다. 그 날이 1885년 8월 3일이며, 바로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된 날입니다.
1887년 2월 21일에는 고종이 학교 이름이 지어 주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자랑하는 “배재학당”(培材學堂), 즉 “나라에 쓸 유익한 인재를 키워내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배재대학교의 기도와 희망 안에 우리 민족의 미래와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이 학교가 우리 민족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듯이, 이젠 여러분 자신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종강을 겸한 예배라고 들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제 여러분이 걸어가는 학문의 길에서 소중한 동행자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평생 동행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시편 23편에 대해 들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널리 암송되고 있으며, 심지어 ‘지상 최대의 시’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시편 23편만큼 대중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숱한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의 악몽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암송하였고, 심지어 미국의 9.11 항공기 테러와 관련한 이야기까지 시편 23편은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즉 시편 23편은 인간의 온갖 위험과 아픔을 하나님과 관계 지으면서, 우리의 삶을 버무려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편을 암송하는 사람마다 시편 23편은 현재진행형이 됩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하나님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 1학년 대학영어교재에 소개된 이야기 한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비행기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으로부터 위문편지를 받게 되었고,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펜팔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성은 편지에 시편 23편을 소개하면서, 이 시를 암송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 군인은 여성의 편지를 계속 받고 싶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연습 비행 중에 잘못된 기류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 동체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그 역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펜팔 여성에게 편지를 썼고, 그리고 마침내 휴가를 가서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대학시절 동안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23편에서 말하는 ‘나의 목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목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주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목자와 양으로 비유한 것은 바로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집짐승인 소, 말, 양은 모두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지만, 이 짐승들을 다루는 방법은 저마다 서로 다릅니다. 소는 뒤에서 몰고 가야하고, 말은 옆에서 다루어야 하며, 양은 앞에서 이끌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모두 아시겠지요? 소는 뿔로 사람을 박을 수 있기 때문에 뒤에서 몰아야 하고, 말은 뒷발질할 염려가 있으니 옆에서 붙잡고 가야하며, 그리고 양은 머리가 나빠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앞에서 인도해야 하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시편 23편은 양과 같은 존재인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들어오고 나가며, 누울 자리까지 살피시는 분,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선한목자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은 세 자리를 잘 잡아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첫째 누울 자리는 잠자리입니다. 사글세보다는 전세가 낫고, 전세보다는 내 집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씀씀이를 줄이고 내핍을 견디면서 내 집 마련에 애쓰고 있습니다. 크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입니다. 이 자리는 다른 말로 ‘육신의 자리’, ‘물질의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물질을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두 번째 누울 자리는 꿈자리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산다 해도, 밤마다 꿈자리가 뒤숭숭하거나 악몽에 시달린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80년대에 유행한 노래 중에 “비가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육신의 자리보다 중요한 게 정신의 자리요, 영혼의 자리입니다. 꿈자리가 소중한 법입니다.
세 번째 누울 자리, 가장 중요한 자리는 묘자리입니다. 물론 이 말은 풍수지리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죽음의 자리, 한 인간이 살아가는 생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좋은 잠자리 즉 물질도 필요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좋은 정신과 의식도 필요하지만,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생의 궁극적 목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죽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법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 머물다가 죽을 것인가? 그 팔 둘레 밖에서 방황하다가 죽을 것인가?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다 이런 누울 자리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편 23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성경에 따르면 행복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자각’입니다. 불신자는 아무리 성공하고 번영하여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실패하고 또 죽음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목자의 존재에 대해 보다 자세히 소개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선한 목자를 가리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풍성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나, 불안에 떠는 자들이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과,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처럼 우리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의 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문이십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탈중심, 해체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심의 해체가 선언되어 버린 탈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삶의 심장부에다 튼튼한 중심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스스로 중심을 해체하고, 변두리로, 낮은 곳으로, 그 소외와 곤궁과 비참의 자리로 자신을 이동해 온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희망의 문’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는 올라가는 사랑이지만, 아가페는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자신을 격상시키려는 욕망이지만, 아가페는 자신을 내어 던지려는 의지입니다.
예수를 아가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내려오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하는 것을 ‘소명’(召命)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역할을 맡기신 것을 자각하는 것을 ‘사명’(使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을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한 사람”이고, “부르심을 쫒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작가 헤시오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훌륭한 일에 부르는 자는 훌륭하다. 훌륭한 자의 부름에 응하는 자 역시 축복 받으리라. 하지만 부르지도, 부름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다만 쉬기만 하는 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에게 놀라운 소명감을 갖도록 하셔서, 앞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자랑스런 배재인이요, 한국인이며, 세계인으로서 인류를 위한 봉사자요, 평화의 참여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설 희망의 문입니다.
이 문은 여러분에게 열정과 성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여러분에게 꿈과 희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여러분에게 성숙한 내일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초대하신 그 부르심에 충실하셔서, 여러분의 꿈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배재학당의 모태가 된 우리 한국감리교회도 여러분을 힘껏 돕고 지원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배재대학교를 사랑하셔서,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해 크게 봉사하고 섬기는 훌륭한 대학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