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대회 개회예배 설교(2006.4.10)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누가복음 23:33-43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세계감리교선교사대회에 참석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006년 세계감리교선교사대회가 계기가 되어 선교사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더욱 힘을 얻고, 도전과 비전을 얻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연초에 서울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선교사묘지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복음전도는 물론 개화와 독립, 근대화를 위해 기여한 선교사들과 가족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저는 문득 120여 년 전 이 땅을 찾아 온 선교사들처럼 세계를 향해 떠난 선교사 여러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육과 복지를 위해 힘과 정성을 쏟았듯이 여러분은 사명 받은 그 곳에서 눈물과 땀을 뿌릴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디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오지와 벽지를 가리지 않고 헌신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본인이 받은 소명이고, 스스로 자청하고 나선 일이지만 가족이 겪는 불편과 불안은 함께 감수해야할 십자가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파송하였지만, 여러분을 충분히 지원하고, 배려하지 못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여러분과 더불어 세계로 나아가지만,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 진실하게 고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선교사대회가 기회가 되어 서로 자성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힘찬 진로와 신실한 모색을 얻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사순절기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는 이삭의 희생이나, 돌아온 탕자와 같은 성경을 주제로 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가 여러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삽입해 그려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한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 또 돌아온 탕자의 모습 속에 자신을 닮은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렘브란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자신의 악역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렘브란트와 함께 그 악역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십자가에 드러난 고난과 영광이란 모순과 역설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욱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몸서리치는 잔혹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 통치자들은 로마시민 아닌 사람과 노예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골 1:20).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실토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분이 멸시와 천대 끝에 두 강도의 십자가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강도 같은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잘못된 판결이요, 가장 큰 인간의 오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커다란 잘못을 통하여 오히려 그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는 경륜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렇듯 강도들의 십자가 사이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온 인류의 죄가 처형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저주 받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처리하는 저주받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불태우는 쓰레기장과 같은 곳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만큼은 인류의 모든 죄를 함께 끌어안고 그 죄 값을 치루는 가장 저주받은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어떤 악질적인 죄수보다 더 중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죄를 직시하면서 떨림과 두려움으로 그것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불타고 있는 내 죄를 고백하고, 깊이 깨닫고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과 능력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린 다른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에게 간구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지금 여기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죽음은 자기의 죄 값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거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을 받은 강도는 즉시 그의 고통을 덜거나, 아니면 기적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영혼이 구원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우리가 말합니다만, 그것은 이 땅에서의 어떤 놀라운 기적을 동반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희생의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 십자가는 내가 그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을 죄인임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와 같이 내 죄를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참된 구원의 기쁨을 알 수 없으며, 부활의 환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맞이한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기도드립시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어떠한 고난이나, 십자가도 그 너머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말씀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선교 사역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크게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참 증인이 되는 길, 거기에 “희망을 주는 감리교 선교사”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100일 앞으로 다가온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WMC)를 위해 선교사 여러분께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특히 여러분이 사역하는 국가의 감리교회가 이 일에 더욱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2006년 세계감리교선교사대회와 모든 선교사 여러분과 가족 위에 크게 복을 내리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