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주일 연합예배 설교(4월 17일, 연수제일교회)
희망을 일으키시는 예수
호 12:6, 행 3:4-10
장애인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이 예배를 통해 장애를 지닌 자매와 형제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자매가 없는 이들에게는 서로 돕고 사랑하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장애인의 현실을 볼 때 그들의 아픔은 정신적· 신체적 장애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체적 결함뿐 아니라 편견이란 사회적 장애는 450만 장애인들에게 더욱 큰 고통이며, 아픔입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정부와 사회공동체 모두가 장애인들이 기본적인 생활과 권리를 보장받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4월 17일을 장애인선교주일로 제정하여 거룩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구체적이고 온전한 구원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간구합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교회와 여러분이 앞장서서 힘껏 장애인을 향한 전도와 봉사를 실천하고,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과 희망을 나눌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께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친구요, 구세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고 말씀하심으로써, 사회적 편견과 신체적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 서셨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의인도 죄인도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건강한 자도 아픈 사람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죄인과 병자를 특별하게 대하시고, 선호하시며,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 원리는 장애인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애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주님께서는 당신께 소망을 둔 그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면 주님께서는 장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소망으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영혼의 문제까지 돌보시는 진정한 치유자이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치유는 차이를 구분하고, 차별을 일삼는 우리 사회와 달리 오히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통합시키고, 서로 돕는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셨습니다. 바로 장애인을 세상으로 내놓으며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 구성원으로 온전히 치유하기를 원하셨던 진정한 치유자이셨습니다.
얼마 전에 ‘말아톤’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야 했습니다.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장애인을 주제로 한 따스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또 흥행을 한다는 점이 놀라왔습니다. 내심 크게 성공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딱딱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조금이라도 벗겨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말아톤을 만든 영화감독이 제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에 속한 분이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집사님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말아톤이 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후 저는 그의 아름다운 성취를 축하하고, 말아톤이 거둔 위대한 결실을 치하하려고 정윤철 감독을 초대하여, 자랑스런 감리교인 패를 수여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와 대화하면서, 장애인 영화는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재능과 상상력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야, 진실로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폐아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아톤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인간승리나 성공사례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생활상의 아픔과 걱정거리, 두려움, 암담함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영화 말아톤처럼 장애인의 삶이 그렇게 드라마틱하면 얼마나 다행이겟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모두 마치 작은 영화감독이 되어 장애인의 친구가 되고, 형제자매가 되어 작은 드라마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눔과 섬김’의 실천이었습니다. 갈릴리의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장애를 호소하며 평생 고통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죄인과 병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은 지배자나 섬김을 받는 자로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소외,연약함에 동참하셨습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목숨까지 나누셨던 그 예수를 우리는 그리스도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삶에 대해 응답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봉사는 ‘디아코니아’인데,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셨듯 허리를 굽혀 봉사하고, 남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 교회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섬김의 직분을 담당하려는 것은 신앙적 응답이며, 윤리의 기본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고통 받는 이웃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한 사회봉사는 시대적 코드입니다.
저는 이런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교회마다 크고 작은 사회복지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속회와 구역회 등 소그룹마다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재소자, 결식아동,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봉사와 결연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자원봉사자로 훈련받고 참여하는 그런 꿈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기독교는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봉사를 통해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는 희망의 공동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호 12:6). 이와같은 희망은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첫 걸음입니다. 희망은 시작을 가능케 하는 힘이며, 미래를 맞이하는 능력입니다. 장애와 좌절,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은 희망입니다. 오늘, 희망 없는 삶과 희망 없는 세상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봉사해야할 현장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희망의 증언자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희망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한 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희망은 바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믿음이 건강할 때는 희망도 결코 병들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희망 없이 믿음도 없습니다”(히 11:1)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약속에 바탕을 두었기에 희망이란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희망은 봉사를 가능케 하고, 섬김을 불러일으키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는 여전히 사도 베드로의 제자 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앉은뱅이 걸인은 하루살이를 위해 한푼 한푼을 걸식했지만, 베드로는 그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오늘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금과 은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금과 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하신 사죄의 은총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는 왜 큰 발톱이 세 개가 있어?”
“아가야, 그건 우리가 사막을 걸을 때 모래 속으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있단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그럼 내 긴 눈썹은 왜 있어?”
“아가야, 긴 속눈썹은 우리가 사막을 여행할 때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준단다.”
아기 낙타가 또 물었습니다.
“엄마, 그럼 내 등에 큰 혹은 왜 있는거야?”
“아가야, 우리가 사막을 오래 여행할 때 섭취할 양분을 그곳에 저장해 놓는단다.”
아기 낙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아하! 모래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큰 발톱이 있고, 사막의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해 긴 눈썹이 있고, 오랜 여행에 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큰 혹이 있고.. 그런데 엄마!”
“왜 아가야?”
“그런데 우린 왜 동물원 안에 있어?”
사실 좋은 장점, 좋은 조건을 갖추고도 동물원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여러분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소중함이 있고, 특별한 사랑스러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한 채, 아니 무시하고 스스로 만든 동물원 갇혀 지내면서 원망만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장애인이나 환자들을 그의 사역 초기에 돌보셨던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이제 교회가 세상의 약자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장애인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일과 영광을 드러내야 참으로 교회의 의미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참으로 죄인과 약자와 장애인의 편안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장애인과 병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앞으로 모든 장애인의 희망이, 그들을 향한 사랑의 봉사가 주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는 분들의 수고와 진심이 오직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부터 비롯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무엇보다 장애인 자신을 통해, 이를 돕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동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한국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