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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품위란 무엇인가

작성자
백승학
작성일
2020-08-14 09:54
조회
477
위대한 품위란 무엇인가

백승학

어느 늦은 가을이었다. 집 근처의 공원 벤치였을 것이다. 소박한 차림의 젊은 부부가 나란히 앉아 무엇인가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약간의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조금 떨어 진 곳에 서 있었는데 손에 열 장이 채 안 남은 전도지를 쥐고 있었다.
나의 이목을 끄는 또 하나의 특이점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연령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딸이 아빠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매미처럼 매달려있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와 분위기가 심상치않다 여겼는지 아빠의 목을 감은 딸의 여린 손목에 힘이 자꾸 들어가는 것이 나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아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도 엄마 아빠의 친밀한 관계와 분위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정서적인 안정을 먹고 산다 할 수 있을것이다.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는 것은 아이도 이미 잘 알기야 하겠지만 마치 휑한 벌판에 혼자 서있는 것만 같은 서늘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어느 아이인들 저렇게 손목에 힘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세 편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일테면 사랑의 지극한 평이함이나 오용의 위험 등을 빌미로 안락함이나 부요함, 내지는 세속에서의 즐거움 같은 것을 톨스토이가 언급해 주기를 내심으로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맥이 빠질 수 있을 반전없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론은 가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여전히 유용하며 부인하기 어려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랑만 있으면 정말 충분한 것일까? 사랑은 넘쳐나는 것 같은데 행복하지 않다거나 사랑은 늘 진행 중인 듯 한데 슬프다거나 또한 사랑이 실제로도 모자람이 없고 일관되는 만큼 가난 또한 그러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랑에 관한 이러한 고민들 중에 "사랑한다면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명제가 사실일까?" 에 해당하는 주제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흔하거나 오래된 질문들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가을, 내가 집 근처의 벤치에서 만났던 젊은 부부 역시 자신들이 처한 가난에 관하여 고민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적지는 않아 보였다. 딸이 입고 있는 낡고 헐렁해 보이는 옷이 혹 나의 그런 생각을 본의 아니게 부채질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고민 중에서 가난이 주는 문제는 가장 심각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가장 쉬운 고민 일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아까 벤치 옆에서의 그 부부 중 누군가가 “여보! 나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 이제 우리 헤어져! 미안해!”하고 말하는 류의 청천벽력만 아니라면 빈들에 나가 버려진 배추 이파리를 주워다가 멀건 된장국을 끓여 먹고 함께 잠이 든다 한들 또 다시 설레는 내일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쓴 구소련의 작가 솔제니친은 자신의 투옥 경험을 바탕으로 구소련의 수용소 생활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수용소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주인공은 하루의 고된 노동 중에도 주머니에 아껴 넣어 두었던 비스켓 한 쪽과 소시지 한 조각을 동료와 나눠 먹으며 담소를 하거나, 또는 고된 일과가 끝난 후 식단으로 나온 배춧국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만끽하곤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여류 작가 권여선은 자신의 저서 '푸르른 틈새’ 에서 주인공인 딸이 아버지와 함께 끓여 먹던 가난하던 시절의 멀건 치킨 스프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실직한 아버지와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서 지내는 딸이 어머니가 일을 나간 사이에 주로 라면을 끓여먹기 일쑤였지만 어쩌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닭 뼈다귀를 푹 고아서 아버지가 건네주던 치킨 스프 맛은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딸은 냉장고를 뒤져 마침 남아있는 닭 뼈다귀를 찾아 멀건 치킨 스프를 끓인 후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에요!” 하며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여기에서 천하일품이라는 어휘의 적용이 단지 물품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전제를 두고 인용하자면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남아있 는 나날'에는 품위에 관련한 묘사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달링턴 가문의 집사로 일하는 스주인공 티븐스는 위대한 집사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품위 (천하일품?)를 지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그 품위란 훌륭한 악센트나 언어구사력, 혹은 폭넓은 지적 교양과도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위대한 품위란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어떤 것이어서 구체적인 사건의 과정을 매개로 드러나는 특성이 있다고 그는 말하곤 한다.
나는 최근에 이 글을 읽으면서 꼭 명문가의 집사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품위 역시 좋은 옷맵시나 교양미 넘치는 태도와도 무관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겪은 사랑의 과정이나, 혹여 그를 향해 몰아치던 시련이나 가난 따위로부터 끝내 지켜낸 사랑에 관한 흔적 같은 것으로부터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진 채 잠이 들고 깨었었다.

출처 https://facebook.com/seunghaak.b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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