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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이성의 인본철학이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냐?

작성자
현종서
작성일
2015-06-11 14:01
조회
1219
기사회생의 기적이 얼마든지 일어나는것이 기독교세계의 work이다. 4차원적 영의 역사가 3차원적 시간과 공간의 세계속에 개입할 때 우리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한다.이것을 믿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는 것이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동정녀 탄생이나 심판의 재림, 성경에 안에 기록된 여러가지 기적 사건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의 한동안 미혹되어 남긴 발자국에도, 또는 엉뚱한 헛소리에도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것을 믿고자 한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될 줄로 뉘 알았던가? 저들이 하나님앞에서 성실할진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살아있는 이들은 이제라도 기독교의 정경과 교리 역사를 다시 공부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기적을 성경대로 믿고 체험한 이들이 현시대에도 많으며 그들의 간증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한편 이미 가신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못 이룬 꿈을 반드시 이루어주기 바란다.
타 종교에 빠져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적이 없고 그안에 살다가 그 안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 건지고자 하는 마음만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 보낼 필요없고 제종교 잘믿어 나름대로의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닐진대)
히말리아 산 등정엔 위험한 요소가 많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디디고 또 다른 이들이 노력하여 정복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선배가 갔던 길 가다가 사고당한 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가 간 길을 가려면 같은 위험을 만나게 될테니 말이다. 이제는 그 위험을 넘어설 장비가 더 보충되어야 하지 않는 가? 또는 다른 코스를 택해야 하지 않는 가? 어찌 같은 장비로 그길만 고집할 것인가?

기독교선교의 방법과 전도의 장비는 인간의 한계를 넘으신 그분의 도움을 입는 다면 얼마든지 새길, 새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다.
교회학교가 안된다. 그런데 스포츠선교 방법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도 잘 활용하고 발전시켜야 하고 또 기상천외의 방법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란다.
달나라 가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동안의 연구과정을 검토하고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새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복음의 토착화일진대 다른 문화토양에 복음의 동일성을 지닌채 토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언하는 성경은 복음의 동일성이라 볼 수 있다. 자기 실존에서 제멋대로 푸는 것을 경계하여 베드로는 어떤 성경은 억지로 풀려 해서는안된다고 경고하며(벧후3:15) 오직 우리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하시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 우리는 폴틸리히의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야 말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 아니라 한 의견일뿐이다. 그는 철학의 질문에 성경으로 답변하고자하는 신학방법을 가지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성경으로 답변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철학적 답변을 만들어 내었다. 선 불교의 "공"사상은 인격적 하나님으로 특수계시로 성육신 하신 분과 유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루시퍼(계명성, 끝까지 숨어 있고, 의로운 성품만 아니라 악도 품고있는 무 )와 유비된다고 볼 수 있다. 학식은 높았지만 경건훈련에 약한 한학자의 그릇된 이론에 온 신학계가 들썩 거렸다. 그가 가르쳤던 뉴욕 유니온(다원주의 신학의 온상), 하바드(동성연애자 교수), 시카고 신학교(포스트모던 신학)의 학풍에서 그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였다.
저 불트만의 신약성경이해는 그당시 과학과 철학수준에선 공감을 얻었을지 모르나 영적인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언어 통계적인 인간이해는 복잡한 3차원적인 세계인의 말에 불과하였다. (워치만의 니의 spritual man 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그는 구약성경을 읽고 믿었는지 의심스럽다. 1세기 과학수준보다 더 못한 기원전 14세기인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은 희랍적 사고를 버리도록 해 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합리적 이성의 이해를 뛰어 넘는 것이 구약의 역사이다.
히브리적 사고로 훈련받았다면 신약의 기적 사건은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고로 훈련받은 이들은 현대에도 "6일 전쟁"의 기적( 천사들이 나타나 도운 사건 등 불가사의 한 일들 많았다.) 이야기을 창출한 것이다.
토착화 신학 작업한다면서 성경의 증언을 부정한다든가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성경증언의 재발견인 종교개혁자들의 발견-"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원리도 배반해서는 안된다.종교개혁신학의 완성이라 볼 수 있는 존 웨슬리의 설교 내용을 왜곡하여-예를 들면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확대 해석하여 믿음이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연신학의 일반계시를 성경의 특수계시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라 자각했던 성경의 증언을 벗어나는 학문은 이미 교회의 학문인 신학은 아닌 것이다. 20세기의 최대의 신학자라 불리운 칼 바르트, 그의 직계 제자 윤성범이 있어 신학에 자부심을 가졌던 감리교 신학대학, 칼 바르트는 윤박사에게 성경을벗어나는 말은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셨었다고 한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좌시하도록 가르치게 된다면(성경비평학을 잘 못 배우면- 성경을 통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적 지식대신에 내용과 상관없는 그 내용을 담고있는 그릇만 연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비평학 몰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그를 표준 삼아 살고자 하는 이들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영적인 지도자로 일으킴을 받는 이들이 있는 현상을 보고 있지 않는 가? 성경을 통해 직접 하나님 만나는 길을 어렵게 만들어 원래 성경을 쓴 이유와 정반대로 성경을 멀리하게 만든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 했던 한국교회, 신학도 서구신학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벗으려는 것은 좋으나 성경의 증언까지 부정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이단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난날 서남동 교수가 통일교를 훌륭한 토착신학이라고 평한 적이 있는 데 이야 말로 한국 신학계에 위험한 발언이었다. 독창성 해석(하나님의 형상을 음양이나 남녀 원리로 해석)이라는 면에서 그리 보았을 지 모르나 통일교 그들이야 말로 성경의 근본 메시지를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이 아니던가?
그래서 성경을 읽되 다른 사상을 가지고 그 사상을 투사하거나 입증하는 방법으로 읽어서는 안되고 성경을 통하여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듣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신학이 대부분 자기 나라의 철학사상을 투사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함으로 성경의 기본 메시지를 상당부분 왜곡해 왔다.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아 그냥볼 때 안보이던 부분이 튀어나 보이고 어떤 부분은 가리워져 보여 본래의 메시지의 훼손내지 오해를 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예수상이 나왔고 그야말로 그런 예수는 한세대 한 장소의 한 청량음료였을뿐 진리의 근본이 되는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는 영원한 진리의 메시지 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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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9 14:47

    선불교의 구원의 길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십우도와 기독교의 구원의 여정을 묘사한 천로역정과 비교하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같은 차원의 다른 묘사일까? 아니면 차원이 다른 행로및 여정의 묘사일가? 전자는 자기의 본성을 찾고 구원이란 선과 악을 넘어선 마음-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것이다.실상은 달라진 게 없고 사물을 보고 대하는 마음만 달라진 것, 깨달은 자는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으로 자기가 바로 부처요, 절대자라는 것 이에 비해 기독교는 자기만 들여다 본다고 자신을 알 수 없고 차원이 다른 세계 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분의 계시적 가르침을 현재 자기의 이성으로 는 깨달을 수 없으나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구원을 갈망하는 중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회생적 사랑으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믿고 따름으로 그 세계가 열리고 그분의 책임하에 영생 복락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도리- 알고 보니 나는 청조자에 의해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피조된 자로 그와의 관계회복을 통해 본래의 내 신분과 축복된 유업을 다시 찾는 것이다. 여기에 저들(불교도)이 알지 못한 자기보다 더 높고 크신 사랑의 아버지가 계시고 본래의 신분을 잃고 고통속에 살아가는 죄인된 자기가 있으며, 마음만 바꾸는 게 아니라, 신분과 운명이 바뀌고 존재가 바뀌고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인 것이다. 불교도에게도 나름대로 구원이라는 게 있으나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의 가르침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모든 게 헛된 것이니 그 운명을 잊고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기독교는 본래 인간 신분의 회복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회개와 복음을 믿음이 필수적인 것이요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없는 인격도야, 그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아닌 자작 노력(학문, 참선, 선행등) 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 유교 도교 유대교 다 자기의 한게를 깨닫고 창조자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로 나아 오라는 것이고 이것은 천지가 바뀌어도 인간이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게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 -성서적 계시 진리해석을 폭 넓게 할 수는 있겠지만 성서의 기본 가르침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고 벗어난다면 그것은 이미기독교의 구원교리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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