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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로 밟는 곳마다 네게 주리라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5-06-13 19:20
조회
1307
네 발로 밟는 곳마다 네게 주리라
여호수아 1:1-9. 마태복음 10:5-8.



우리는 자신의 걸음 걷는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비판도 하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이렇게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는 한 사람의 생애를 잘 평가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갔습니다.
또 후세의 사람들도 앞서간 사람들처럼 살다가 갈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발걸음도 매우 중요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삶, 다시 말해서 미래의 발걸음은 더 중요합니다.

마치 운동경기장의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달려갈 코스를 바라보는 마라토너의 긴장된 모습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정돈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주인공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임하셨나? 살펴보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우리의 삶의 자세와 신념의 발걸음을 다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애급에서 출생하고 초년기를 살았습니다.
초년기의 인생길은 억압과 박해를 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애급을 말할 때, 영적으로 어두운 죄악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로 왕은 죄악세상을 다스리는 마귀의 총수요, 간역 자들은 마귀의 부하들이며 졸개들입니다.
여호수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애급사람들 틈에서 살았고, 자라면서 애급사람들에게 학대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본의 아니게 죄악세상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에 얽매어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에서 스스로 구출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죄악세상을 이기고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도움으로 바로를 이기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음으로 사탄을 이기고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중년의 삶을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광야는 고난과 역경으로 훈련받는 삶이었습니다.
광야를 말할 때 영적으로 연단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에는 뜨거운 태양열과 열사의 무더위와 갈증으로 목이 마르고 모래바람이 많으며 불 뱀과 전갈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광야에는 물이 귀하고 양식과 채소가 없는 땅입니다.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신앙의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거역하며 괴롭게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지도자 모세를 업신여기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애급으로 되돌아가자고 반기를 들었고, 어떤 때는, 하나님 대신에 황금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고 춤추며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모세는 범죄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세를 택한 종임을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모든 백성들이 단합을 하고 자원을 하여 하나님의 성막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영광의 구름으로 응답하셔서 성막을 가득 덮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중년의 삶을 권선징악의 사건들을 보면서 믿음으로 자신을 정리하며 살아왔습니다.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이고 무엇이 저주를 받는 일인지를 경험하였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무엇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현재의 삶의 향락보다 미래를 위한 믿음의 연단을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여호수아는 이제는 노년의 삶이 남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연단과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향한 응답의 삶을 새롭게 출발할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애급을 나왔으나 이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관문이 그의 앞에 놓여있습니다.
다시 건너가야 할 요단강이 눈앞에 굽이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기근과 굶주림과 시험과 싸우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방인 거민들과의 싸움이 남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극기와 연단의 싸움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사람과 신천지 정복을 위한 싸움이 남아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생애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앞으로 당하게 될 신천지를 정복하는 길은 더 많은 시련과 역경이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몇 번씩이나 다짐하고 분부하셨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그러면 우리는 여호수아에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의 시대가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기에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누구에게나 주신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시간 나와 여러분!,
여러분과 나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분부임을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는 일이 남았습니다.
요단강을 지리적으로 보면, 북쪽에는 눈에 덮인 헬몬산에서 녹은 눈이 흐르기 시작하여 홀레호수를 채우고 넘쳐서 갈릴리바다를 지나 사해바다까지 흘러갑니다.
해발 3033m의 헬몬산은 4계절 흰 눈으로 덮여있는데 멀리 갈릴리바다에까지 반사되어 신비롭게만 보입니다.
헬몬산 꼭대기 정상에 오르면 멀-리 사시사철 흰 눈으로 덮여있는 레바논산이 보이고, 갈멜산과 갈릴리바다와 요단들과 사해바다까지 다 보인다고 합니다.
헬몬산에 쌓였던 흰 눈이 녹아서 흐르는 물은 홀레호수를 채우고 넘쳐서 아래로 아래로 다시 흘러서 갈릴리바다를 채워서 많은 고기들이 번식하게 하고, 다시 아래로 넘쳐흘러서 구비 구비 돌아서 사해바다에까지 흘러 들어가는데 이 요단강 주변의 토질들은 기름지고 풍요로워서 각종 동식물들이 잘 자라고 경치도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요단강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큰 뱀이 푸른 숲 사이로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요단강이 흐르는 주변의 땅은 아열대 수목들이 많이 자라며 경작지가 많아서 목축업과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요단강을 경계로 서쪽 지중해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강의 길이가 216Km이고, 굴곡을 따라 수로가 400Km이상이나 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요단강의 경계에 이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영적인 영혼의 요단강을 건너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애급같은 범죄의 소굴, 죄악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좋지 못한 범죄의 습관을 버리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고 떠나보지만 언젠가는 단절시켰던 과거의 행동을 다른 곳에서 다시 되풀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명인이 아프리카의 미개한 밀림지대에서 산악생활을 즉시 적응하며 살 수 없고 야만인이 문명사회에 즉시 적응하여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수용소나 구치소에서 지내던 범죄자들을 석방하고 자유를 주어도 즉시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기에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그 지역을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다시 재범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군대에 갓 입영한 청년들이 즉시 좋은 군인이 되지 못합니다.
훈련소에서 각종 힘들고 어려운 훈련을 받고 거칠고 험악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정예의 군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광야의 생활은 원망과 불평의 세월이었고 거역과 불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찬란한 미래를 위해 연단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며 죽도록 괴롭히는 삶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못된 습관, 못된 성품들이 바뀌기 위해서는 광야교회에서 오랫동안 연단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야교회생활에서 연단 받아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천국의 시민으로 합격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을 잘 하는 성도가 천국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새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던 성품들이 모두 죽고 새로 태어난 감사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충성하고 헌신하는 열심의 성품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새 사람 새로운 성품의 사람으로 바뀔 때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못된 습관, 악한 행동을 버리고 악한 성품과 악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바로 현실의 요단강을 건너는 삶입니다.
불평불만을 버리고 원망과 탐욕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미움을 버리고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눈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신령한 영적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애급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홍해는 세상 출구를 상징합니다.
광야는 교회이며, 요단강은 새로운 삶의 입구요, 가나안은 천국이라고 볼 때, 요단강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죽음처럼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천국의 관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죽음을 당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산채로 천국으로 데려가셨고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 이삭도 변화의 사람 이스라엘도 용기의 사람 다윗도 지혜의 왕 솔로몬도 모두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관문이요, 시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죽음 앞에 두려워 떱니다.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죽지를 않고, 천국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이 바라고 있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죄의 흔적, 죄인의 모습,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탈을 그대로 쓰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죽음이 시작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뒤부터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 육체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은 육체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벗어버리고 속사람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성품의 사람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선한 성품의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의로운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변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새사람이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고 담대해질 것입니다.
순교를 당해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들이 보혈로 정결케 되고 의로운 새사람이 되면 천국의 시민이 된 자격을 당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당연히 영적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 새 사람이 되도록 힘씁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범죄의 장소를 멀리 떠나야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의 모습을 닮으면 안 됩니다.
“너희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범죄의 요건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악 된 모습을 버리고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 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빠지고 나서 시험에 들었다고 핑계대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합니다.
죄의 성품을 모두 버리고 주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뒤에 취해야 할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작은 민족이지만,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것은, 인류에게 하시는 모습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어지는 사건들은 인류사회가 되어지는 사건들의 전초전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이며 축복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인류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약속하신 땅의 상징으로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자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약속과 명령들은 인류에게 주시기 위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일하시고 역사하셨던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창조의 순서와 질서를 보아도, 모두 인간을 위해 일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땅을 정복하라고 하는 것을 마치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잘 가꾸고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요, 스스로를 망치는 행위입니다.
자연과 땅을 잘 보존하고 가꿔야 인간 자신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으로 가꾸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면 자녀들이 잘 가지고 놀면 부모도 흡족하지만 이내 부서뜨리고 파괴해버린다면 부모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고 창조하신 땅을 인간들이 잘 보존하고 가꾸며 지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나안 땅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인간들 틈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가나안까지 인도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시고,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별로 좋은 땅은 아니지만(창 13:11), 하나님의 축복은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신 땅이며(출 3:8), 후손들이 땅의 티끌같이 번창할 땅입니다(창 13:16).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려고 그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죄악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죄인들이 우글거리는 땅에 살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려고 가나안 땅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의 이런 약속은 이미 오래 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도 다짐하셨습니다.
그 땅은 여호수아가 정복해야할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정복할 능력과 사명을 여호수아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땅을 버리고, 이방에서 430년간 노예로 생활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애급을 벗어난 이후,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백성을 이끌 지도자는 여호수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려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시고 함께 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과 책임을 주실 때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일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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